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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가마솥 / 정현숙

부흐고비 2021. 2. 15. 12:47

나이가 들수록 탄력을 잃어 가는 피부처럼 금방 지은 밥인데 윤기가 없다. 어려서 먹던 싸래기로 지은 것도 아닌데 현란한 세상에 고급스러워진 혀끝이 변덕을 부리는가. 맛을 잃어버린 슬픔을 알아버렸을 때 오는 허기, "식욕은 성욕이요, 성욕은 성취욕이라. 식욕이 없어지는 것은 살맛을 잃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이 떠오른다. 선생님을 뵙기 위해 서울 외곽에서 흙과 남은 인생 보내시는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의 대쪽같은 성품이 묻어나는 집안 구석구석은 서재에 고서를 꽂아 놓은 듯 정갈히도 삶의 흔적들이 꽂혀있다.

모처럼의 시골 정경을 가슴에 한컷 담아두려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헛간 가장자리에 천년의 한(恨)을 머금고 녹이 슬어 있는 무쇠 가마솥이 눈에 스친다. 귀퉁이가 뭉게져 떨어져 나가 있다. 거북이 등처럼 새겨진 서러운 금들이 세파의 갈고리에 핥혀 문신으로 남아있음이 여간 가여운 것이 아니다. 몇 대에 걸쳐 되물림 되었음직한 가마솥이 길잃은 미아가 되어 헛간 한켠을 차지하고 있음이 아닌가.

한번 부뚜막에 걸리면 죽을 때 까지 그집 귀신이 되어야 하던 가(家)의 상징, 불(火)의 상징이던 가마솥은 여인들의 운명과도 같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팔자소관이던 여인들의 운명이 자신들이 개척하는 만큼 달라지고 보니 가마솥의 운명도 갈림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여인들은 각기 제길을 찾아 길을 떠났으나 가마솥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져 헛간의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되었음에 특유의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자신들과 고락을 함께한 가마솥을 제일 먼저 버리고 금밖너머 생경한 세상으로 떠나버린 여인들, 그것을 버리면 억새풀같이 질긴 삶에서 자유할 줄 알았을까.

입이 무겁기가 하늘같고, 뚝심은 황소같아서 내 어머니와 그 어머니들의 한스러운 푸념을 모두 들어주던, 철없는 신랑보다 나은 가마솥을 여인들은 어찌 운명처럼 사랑하지 않았으랴! 이제는 밑바닥 인생이 되어 언젠가는 부뚜막 제자리에 내 걸릴 일을 고대하면서 기다리는 그 인내가 한없이 처절하다. 그 옛날 기다리기가 삶이었던 여인네들처럼 오늘 하루도 왠종일 구석쟁이에서 폐병환자같은 모습으로 기다렸겠지, 녹슬어 노랗게 곤내가 나는 솥단지 피부는 얄싸한 슬픔으로 축축해져 까실하기가 말이 아니다.

윤기 자르르 흐르던 그 자태는 어디 가고 살점이 벗겨지는 혹독한 피부병에 걸려 있다. 손가락으로 조금만 만져도 바시시 껍질이 벗겨진다. 달궈질수록 단단하여 건강미를 자랑하던 몸둥아리는 곧 고물상으로 몇 가락의 엿값도 채 못 받고 팔려 갈 것 같다. 그리 그 인생이 마감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더욱 안스러운 가마솥 앞에서 궁색한 피붙이를 보고 차마 발걸음이 떼지질 않는 큰언니의 심정이 되어 멀그머니 서 있다.

내가 어려서만 해도 집집마다 군불을 지피던 시절이 있었다. 사각의 아궁이 앞에서 세월을 태우고 계시던 어머니, 부엌이래야 부뚜막 위에 시렁을 매달아 그릇 몇 잎을 얹어 두고 한켠엔 장작더미 겹겹이 올려놓은 것이 전부인 그곳에서 변함없이 걸려있는 가마솥과 어머니의 인생은 눈보라를 맞으며 부부의 연으로 살을 섞었다.

그들의 무거운 삶의 무게가 비슷하여 함께 보듬고 울고 웃던 질긴 인연, 어머니는 새벽장에 가기전 약삭 빠른 놈들에 밀려 미처 물러가지 못한 별들이, 짝이 맞지 않아 소리가 요란한 부엌문 틈새로 스러져 들어 올 때, 지피던 군불이 뜨거워 놀란 양수가 터지고 밥알이 새파랗게 익어가는 진통으로 가마솥 솥뚜껑을 잡고 악을 쓰면서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나 역시 가마솥과 질긴 연을 맺고 있음이 아니던가. 새벽잠이 없는 이유를 알 것같다. 새벽에 만상이 눈을 뜨기전 태어난 까닭일까, 책을 보아도 글을 써도 기도를 하여도 새벽만큼 나에게 평온을 가져다 주는 신선한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천지가 태동하던 시간도 아마 새벽 미명이었을 듯싶다.

여인네들의 한과 설움으로 붉어진 붉은 모래를 이기고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봉사 삼 년의 기막힌 세월의 체에 걸러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을 걸러지면 이미 기다리고 서서 가부장의 기세등등한 큰 웃음으로 입을 잔뜩 벌리고 있는 주물틀에 흔적 없는 존재를 꾹꾹 채워 넣는다. 그래도 숨은 쉬고 살았던가. 숨구멍을 뚫어 공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여분을 준 후에 시집살이로 달구어진 1700℃의 용광로에서 삭아지고 녹여낸 철물이 부어지면 비로소 완성되는 가마솥.

가마솥과 여인들의 인생은 참으로 닮은 점이 많다. 그 높고 높은 심사와 규격에 한치 흠 없고 점 없는 규수들이 합격하여 집집마다 시집와 들어앉았다. 그때부터 고생문이 시작되는 것도 흡사하다. 말할 수 없는 침묵이 언어가 되었음도, 기약 없는 내일을 가슴에 묻고 가(家)의 계승과 가(家)의 번영을 위해 절대적 타자로, 희생자로 살아야 함도, 부엌문을 열면 제일 중앙에 버젓이 걸어두었던 가마솥처럼 덩그런 안방 중앙을 차지한 댓가로 죽을 때까지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했던 여인들은 일반으로 같았다.

가마솥은 수렵 생활과 어로 생활이 살이의 전부이던 시대에서 농경문화로 발아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를 거쳐 6세기경에 만들어졌다. 우리네 주식이 처음부터 밥은 아니어서 곡물을 으깨어 토기로 만든 그릇에 그저 끓여 먹다가 시루에 쪄서 떡으로 먹다가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솥이라는 것이 발명된 이후에 밥이라는 것을 지어 먹었다.

어머니 온기 같은 은근한 열을 올려주고, 심지 굳은 솥두껑으로 눌러주면 변덕 없는 밑바닥은 100℃가 넘지 않는다. 올곧고 심성 바른 가마솥에서는 맨발로 뛰어나가려는 성질 급한 수증기의 증발이 자연스레 막아져 찰지고 윤기 나는 밥이 지어졌던 것이다. 우리네 삶과 밀접하게 자리하고 있어 삶의 한 부분으로 얽히고 섥혀 씨줄과 날줄로 짜지던 베틀 같은 가마솥이 일본이라는 곱지 않은 나라에서 들여온 양은냄비에 밀리고 말았다. 어디 그것만 밀리었겠는가 마는 양은냄비의 그 얇고 변덕스러울 만큼 천박함이 잔잔히 느긋하게 천천히 은근히 일어나던 어머니의 정을 우리내 식탁에서 내 몰고 말았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지어지던 밥대신 전기밥솥과 압력솥에 양은냄비로 프라이팬으로 '후딱 빨리빨리' 해주는 밥과 찬을 씹어 그 단내를 맡기도 전에 일어서야 하는 인정머리 없는 밥상을 만들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 도처에 뿌리내린 냄비근성은 '빨리빨리' 병을 전염시켰고 대형사고와 대형범죄들을 불러일으키면서 사회를 좀먹고 냉혈 인간들을 복제하더니 삭막하다 못해 천륜도 통하지 않는 시대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냉냉한 가슴팍에 소화도 되지 않는 밥알이 쌓여 지는 수가 늘수록 사심이 없는 어머니의 큰 손으로 한 솥 가득 밥을 하여 가족끼리 이웃끼리 나눠 먹던 그 시절을 어디에서 찾을까.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는다고 했던가. 가마솥에서 은근과 끈기로 지어내던 밥알을 먹을 땐 참고 견디는 법과, 밥알이 삭아 녹아지도록 헌신하고 희생하며 사랑하며 사는 법을 알았다. 나눌 줄 알았다. 삶의 우직함과 성실함이 있었다. 넉넉하고 후덕한 인심이 있었다. 끓일수록 진국이 나오는 끈덕진 인내의 깊이가 있었다.

은근과 끈기로 단련된 우리 겨레의 얼도, 어머니가 가르치는 자식 교육의 산 체험의 자리도, 너와 나눌줄 알게 하던 덕으로 빚어진 품성도, 가진 것 없어도 형제와 우애하며 밥상을 받으면서 자린고비를 이겨냄도 이제는 먼 옛날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 문명을 탓하랴. 솥단지를 버리고 제 길을 찾아 떠난 여인들을 탓하랴, 버린 것에 대한 후회가 짙어진다. 잃은 것에 대한 미련이 아련하다.

발 빠른 땅거미는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놀란 저녁노을은 굴뚝으로 배설되는 문명의 이기로 피어오르는 연기 위에 살그머니 내려앉아 하품을 한다. 저 연기들에 부식되어 이 밤이 새고 나면 가마솥의 살갗은 또 얼마나 까실하게 덧주름이 질까. 오늘따라 선생님 댁에서 지어주신 흰 쌀밥이 이리도 찰지게 윤이 흐르는 이유는 제 구실 할 날만 기다리는 가마솥이 환생(幻生)이라도 하여 또렷하게 밥알 가득 되살아 오르기 때문 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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