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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코드가 맞나요 / 이순주

부흐고비 2021. 2. 18. 17:36

녹즙기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스승의 날 선물로 녹즙기 한 개를 받았다. 대중 앞에 내놓고 쓰면 더 유용할 것 같아서 기숙사에 공용으로 내놓았었다. 다음날이었다. 도우미 할머니가 220볼트 코드에 맞추지 않고 150볼트 코드에 꽂아 녹즙을 짜다 녹즙기의 모터가 타버렸다. 코드 사용을 확인시켜주지 못한 잘못이 얼마나 후회되던지 고장 난 모터를 애완견 쓰다듬듯이 며칠 동안이나 어루만지다가 새로 사는 가격을 거의 다 주고 모터를 수선한 일이 있었다. 그 뒤부터 나는 전열기를 쓸 때는 코드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교당의 감원할머니는 코드가 맞지 않은 다리미를 220볼트로 전압을 높여 사용하신다. 수년간 손에 익은 다리미인지라 트랜스를 사용하면서 할머니는 그 다리미를 쓰신다. 삼베로 된 여름방석 손질을 하면서 올해에도 트랜스를 통하여 다리미의 코드를 맞추어 구김을 펴신다. 오늘은 대청소를 하기 위해서 빼놓았던 컴퓨터의 본체와 스캔, 프린터기 등의 코드를 맞추어 보느라 시간이 걸렸다. 코드를 만지다가 코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코드가 맞지 않으면 전기의 힘이 약해진다. 그리되면 변화가 없고, 변화가 없으니 유용성도 떨어진다. 100볼트 코드가 맞지 않으니 전압을 올려서 코드를 맞추어 사용해야 한다. 100볼트와 220볼트 겸용을 사용할 때는 사용하기 전에 코드가 잘 맞추어졌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정치권에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라는 말들을 자주 한다. 코드(code)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컴퓨터 등에 기억시키기 위한 부호 또는 부호체계"라 쓰여져 있었다. 사람들은 기왕이면 같은 코드를 사용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서로 맞지 않은 코드를 맞추느라 소비되는 에너지를 계산해보면 손해볼 게 뻔하기에 그렇다.

지금 세간에는 지난해 대선 이후 벌어진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이 그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진통하고 있다. 대미관계가 그렇고 남북관계가 그렇다. 진보와 보수의 코드, 이 양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코드가 다른 삶을 법이라는 굴레에 넣었다 뺐다 한다. 코드를 맞추어 보려고 돌아가기도 하고 좀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

서울에 있는 S 대학교수가 보수와 진보에 대해 말하기를 "보수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진단하는 것이고, 진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잣대로 현재를 진단하는 것이다."고 정의하였다. 그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같이 근무하는 후배가 물었다. "진보와 보수도 하나의 코드로 합일되는 시점이 있을까요? 아니면 영원히 평행선으로 갈 수밖에 없을까요?"
"혹 하나로 만나더라도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일어나겠죠." 그가 대답했다. 코드라는 게 지금은 맞지만 후에는 맞지 않을 경우도 있다.

내 코드는 어떤지 살펴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대집단 속에서 코드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어렵다. 코드를 맞추어 보려고 전압을 높이듯이 노력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좀 기다리기도 한다. 코드가 안 맞는 사람과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코드만 고집하고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긴 코드는 그저 배척해버리지는 않는지 아니면 한발 다가서 보고자 노력을 하는 것인지 성찰해 보았다. 내가 쥐고 있는 코드에 집착하지는 않을 텐데…. 바른 코드에 꽂아지는지 코드를 바라다 보았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작용하는 가운데 이목구비가 쉼 없이 일하고 순간 간을 소중히 취사해야 할 처지에서 무골호인처럼 지낼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꽂아야 할 수필이라는 문학 코드는 행촌수필문학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이어져있다. 문우들과 수필가 김학 선생님의 코드에 맞춰 재활치료를 하는 장애자처럼 완성을 향해 다가서는 연습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마련하고 싶은 코드는 별처럼 많다. 코드마다 빛이 나는 별빛이 되고 싶다. 스승과 도반들을 통해서 은혜로움으로 무지와 질병과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하려는 내 코드가 녹슬지 않도록 챙겨보기도 한다.

내 코드는 지금의 나와 코드가 맞지 않은 사람도 수용할 수 있는 바다처럼 확 트이고 드넓은, 덕이 있는 코드였으면 좋겠다. 인과에 맞고 영원하고 투명하며 고금을 관통하는 내 코드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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