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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봄이 오는 소리 / 백임현

부흐고비 2021. 2. 19. 01:42

추운 날이었다. 아끼던 제자가 얼마 전 포장마차를 시작했다고 해서 찾아갔다. 바람 부는 빈터에 붉은 천막을 치고 모서리마다 꼬마전구를 장식해 놓은 포장마차가 그의 가게였다. 출입문 앞에는 단정한 글씨로 메뉴를 적은 종이가 선전 문구처럼 천막에 붙여져 있었다. 그 글씨체가 낯익은 제자의 글씨였다. <과매기> 얼마 <닭곱창> 얼마 <낙지볶음> 얼마…. 그 외에 몇 가지 음식이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저렇듯 여러 가지 음식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안주가 시원치 않으면 사람들이 안 올 텐데 우선 그 걱정이 앞섰다. 밤이면 골목길에서 자주 눈에 띄는 포장마차. 남이 하는 것은 밤거리의 낭만적인 풍경으로 볼 수 있었는데. 막상 사랑하는 제자가 하게 되니 그것은 낭만도 무엇도 아니고 단지 치열한 생존의 현장일 뿐이었다.

사십 대 중반인 제자는 초등학교 삼 년간 나와 같이 공부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뛰어나게 잘 썼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절 글씨 쓰기는 매우 중요한 학습의 기본이어서 공책을 보면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의 글씨는 어제나 칭찬을 들었고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었었다. 세월이 흘러 삼십여 년이 지났어도 잘 쓰던 솜씨는 여전하여 지금은 포장마차 안주감을 광고하는데 발휘되고 있었다.

포장마차 제자는 내가 친아들처럼 아끼는 몇 사람 제자 중의 하나이다. 인품이 어질고 성실하여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숙하게 지내고 있다. 수재는 아니었으나 그는 어린 시절 꾸준하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숙제가 아무리 많아도 어김없이 잘해 왔고 다른 아이들이 싫어하는 궂은일을 꾀 부리는 일 없이 묵묵하게 혼자 해내곤 하였다.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믿음직한 자세는 누가 보아도 될성부른 나무로 그의 장래에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그를 본 받으라고 일렀다.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였고, 글쓰기에도 소질이 있어 시인이 되고 싶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서 대학의 섬유공학과를 나와 부모님이 경영하던 섬유회사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그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부모님이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건실한 인품과 노력으로 한동안 꽤 성공을 거두고 있었는데, 중국제품이 들어오면서 국내의 섬유업은 급속도로 퇴조하기 시작했고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회사를 살려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은 회사를 정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사십 대의 가장이었다. 한창 교육비가 많이 드는 아이들이 중요한 성장기에 있었고 부양해야 할 부모님이 계셨으며 갚아야할 부채도 있었다. 한시도 백수로서 무위도식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다. 그는 이제 사장도 아니었고 중산층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막막한 현실에 던져진 이 땅의 사십대였다. 한때는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기업가의 꿈을 키워가던 유망한 젊은이었으나 오늘 빈주먹으로 바람 부는 거리에 서게 된 것이다.

제자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마음이 아픈 것은 직업에 대한 귀천이나 편견 때문이 아니었다. 한창 활기차게 일할 나이에 그가 겪었을 참담한 좌절이, 사오정이니 삼팔선이니 하는 말이 예사로 통용되는 사회현실에서 졸지에 생활기반을 잃고 방황하는 제자의 모습은 이 나라 수많은 사십 대들의 실상이며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내 아이들의 모습이기도 해서 우울하였다.

시대가 이렇게 변할 줄 알았으면 이 험한 세상 당차게 살도록 영악하게 가르칠 것을. 수신교과서적인 이야기만 하면서 착하고 정직하고 양보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었다. 제자들의 고생에는 세상을 잘못 짚은 무능한 교사의 책임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제자의 가게는 수유 사거리 주택가 골목 초입에 있었다. 자리는 잘 잡은 것 같았다. 비닐로 된 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니 썰렁한 공간에 둥근 탁자가 몇 개 놓여 있고 연탄난로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뜻밖에 나타난 우리를 보자 제자 내외는 너무도 반가워하였다. 어릴 때 선생님을 보고 좋아하던 천진한 표정 그대로 구김살 없이 밝았다. 그러나 찬물에서 일을 하다 나온 듯 우리를 잡아주는 그들의 손이 얼음장 같이 찼다. 나나니처럼 몸이 약한 그 아내의 가느단 손가락이 찬물에 얼어서 빨갛게 부풀어 보였다. 비록 웃고 있으나 그들의 고생이 어떤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우리는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좌절을 딛고 일어선 그의 용기 있는 결단에 아낌없는 격려를 보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출세한 제자들은 텔레비전에 은사님들도 잘 모시고 나오던데,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그의 음성에 쓸쓸함이 서린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나누며 우리는 일어섰다. 그는 문 밖에 나와 우리를 배웅하며

“열심히 살아 보겠습니다. 지금은 이래도 봄이 오면 차츰 나아지겠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확신에 찬 그의 밝은 음성이 그늘졌던 마음에 봄의 소리처럼 한 가닥 희망을 준다. 지금도 봄은 분명 어디쯤 오고 있겠지. 봄이 오면 그들의 손도 더 이상 얼지 않을 것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이 추위를 견디고 있다. 어두운 터널 같은 겨울. 그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나 그 터널 너머에 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인가.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포장마차 제자가 어렸을 때, 우리는 새 해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환희의 봄을 기다렸었다.
그들은 지금 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백임현 수필가

전직 교사,

1987년 《동서문학》 등단,

문인협회회원, 에세이문학 이사, 수필문우회회원, 송현수필 회원,

저서:《놓치고 사는 기쁨》 《아침소리》 《강촌에 가고 싶다》 《텃밭에 머무는 사계》

수상 : 제17회 현대수필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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