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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킹콩의 눈 / 장영희

부흐고비 2021. 2. 25. 10:56

나는 영화에 문외한이다. 또 나에게 영화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제껏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킹콩'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줄거리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상 깊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지 모른다.

킹콩은 내가 일부러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이다. 그 영화를 본 날짜와 장소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1978년 1월 12일, 난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난 후, 시내의 한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그날은 모 대학에서 박사 과정 시험을 친 날이었다. 석사 졸업반이었지만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고, 나의 모교에는 박사 과정이 개설되기 전이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응시자들은 오랜 필답 고사를 보고 오후에 면접을 보게 되어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실에 들어서니 앉아 있던 네 명의 교수가 동시에 나와 내 목발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중 한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 학부에서는 장애인은 받지 않아요. 박사 과정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인데 그렇게도 단도직입적이고 명료하게 말하는 그 교수 앞에서 나는 완벽한 좌절은 슬프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미소까지 띠며
''그런 규정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인사까지 하고 면접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날 집에서 기다리시는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전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동생과 함께 본 영화가 '킹콩'이다.

그 영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몇몇 장면뿐이다.
거대한 고릴라가 사냥꾼들에게 잡혀 뉴욕으로 옮겨지는 도중에 우리를 탈출하여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위에 앉아 있는 킹콩은 건물만큼이나 크고 거대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킹콩은 한 여자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킹콩은 그녀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러나 킹콩은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포획되기 전, 킹콩은 그녀를 자신의 눈높이로 올려 자세히 쳐다본다.

그 눈, 그 슬픈 눈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에게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닌 커다랗고 흉측한 고릴라였기 때문에….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킹콩이라는 걸.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으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내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여 아무런 할 일 없이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교수들의 말은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킹콩이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편견과 차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토플 책을 샀다. 다음 해 8월 나는 내게 전액 장학금을 준 뉴욕의 모 대학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다시 돌아 왔다. 나를 면접하기조차 거부하고 '운명적'인 선언으로 내 삶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그 위원회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다.



[네이버블로그 Zorro의 글창고] 나를 사로잡은 사람, 장영희

 

나를 사로잡은 사람, 장영희

나를 사로잡은 사람, 장영희  -장영희 에세이 ‘내 생애 단 한번(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 샘터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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