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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참빗 / 강숙련

부흐고비 2021. 2. 25. 15:23

경주의 어느 콘도에 여장을 풀기로 했다. 체크 인 시간이 두어 시간 남았기에 몇 군데 민속공예점을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물건을 만났다. 그것은 살이 아주 가늘고 고운 진소(眞梳)였다. 얼레빗(月梳)과는 달리 대나무 살이 실낱같이 아주 섬세한 빗이다. 빗살이 촘촘하고 가지런하며 사방 모서리가 꽉 여문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야무지기 한량이 없다. 그래서 참빗이라 하였을까.

양쪽 귀퉁이에 질긴 실이나 끈을 탱탱하게 매어서 빗살의 간격을 더욱 죄게 해서 쓰던 참빗. 하마터면 이름조차 잊을 뻔했던 추억의 귀물(貴物)이다. 그러나 이제는 긴요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민속공예품이라는 고상한 차림새로 진열장 속에 들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소꿉동무가 귀부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기분이다.

손가락 끝으로 가늘고 뾰족한 빗살을 가만히 퉁겨 본다. 아릿아릿한 느낌이 손끝이 아닌 머리 밑으로부터 되살아난다. 가지런한 댓살 사이로 얼핏 옛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빈틈없이 단정한 모습, 앞가르마가 반듯한 쪽머리의 그녀가 만약 수절하는 청상과부라면 상상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옷고름 단단히 여미어 잡고 밤새도록 속울음을 흐느끼는 여인, 참빗은 그녀의 갈비뼈다. 빗살 자국이 나도록 훑어내려 실핏줄 선명히 일어서는 젊은 과수댁의 바람기다. 여기에 야릇하고 짜릿한 느낌이 있다. ‘젊은 과부’라는 데서부터 뭇 사내의 관심과 미혹이 시작된다고나 할까. 과일로 치면 한껏 농익어 금방이라도 단물이 질척거릴 것 같은 느낌, 꽃으로 치자면 흐드러진 향기에 정신이 어칠거릴 것 같은 만개의 절정. 뭐 그런 느낌이 아닐는지.

젊은 과수댁의 바람기는 때때로 매혹적일 수 있다. 적당히 도사린 바람기는 ‘바람 난 것’보다 한층 더 짜릿하다. 빗살이 팽팽히 일어서듯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반란 같은 ‘끼’를 지그시 누르고 사는 여자야말로 참빗 같은 여인이다.

요즘의 미망인이야 연애도 하고 바람도 난다지만 옛 여인에겐 독야청청 수절만이 있을 뿐이다. 참빗처럼 자신을 단단히 비끄러매지 않으면 타락이요 탈선이다. 양쪽 모서리를 죄어 맨 참빗의 허리끈은 수절녀의 치마말기와도 같다. 그녀가 지켜야 할 자기 절제의 마지막 선이다.

그녀에게도 왜 바람 같은 그리움이 없겠는가. 엉킨 머리카락이 촘촘한 빗살을 빠져 나오듯 여인의 갈비뼈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지나간다. 머리 밑이 따갑고 목이 앞뒤로 휘청거리며 가슴에는 실핏줄이 일어난다. 어쩌다 빗살 하나 부러지고 나면 머리 밑은 더 아프다. 차라리 올곧고 성한 참빗일 때가 덜 아프다. 방심하여 빗살 몇 개 실족하고 나면 수절과부의 바람기는 뭇 사내의 유혹을 내놓고 받게 된다. 허방을 디딘 것이다. 종아리 보면 허벅지 보았다 하고 허벅지 보면 배꼽 보았다 한다지 않던가. 이래저래 과수댁의 심정만 더 복잡해진다.

고향에 가면 스물아홉에 남편을 잃은 동서가 있다. 너무나 꽃다운 나이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마음이 언제나 쓰리고 애련하다. 남편과 사별한지가 어느새 몇 년이 후딱 지났건만 그녀의 가슴에 아직도 존재하는 남편이 있어 발걸음을 떼어 놓기 어려운가 보다.

폐암 말기, 임종을 앞둔 시동생은 어리광부리듯 젊은 아내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속절없이 꺼져가는 청춘이 억울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승에서 못다 해로한 사랑을 저승에선 영원히 해로하고픈 안타까움이었을까. 지내놓고 보니 그것 또한 어이없는 인간의 이기심이었던 것을.

반듯하고 아름다운 새 삶이 젊은 동서에게 다시 열리기를 바라면서도 혹여 허방을 딛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자존심이란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것이다. 팽팽한 대나무 살을 단단히 죄어 매듯 자신을 야무지게 단속해야 할 때가 많은 세상이다. 참빗은 옛 여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진열장 속의 참빗을 만지작거리다가 혼자된 동서를 생각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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