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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공터 / 배귀선

부흐고비 2021. 2. 24. 20:44

낮게 드리운 파릇한 햇살이 까닭 없이 닭의 부리에 쪼이고 노곤한 바람,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자울거리는 뜨락, 며칠 전부터 딸싹거렸던 텃밭 몇 두럭을 갈아엎는다. 새참 나절, 삽질에 묻어 나오는 맨살의 봄을 헤집어 보며 두어 사발 들이켠 막걸리가 골마리를 내리게 하였는데.

​ 사알짝, 매화나무 방패 삼은 뜨뜻한 방뇨에 놀란 꽃잎이 내 머리 흔드는 것처럼 진저리 치며 떨어진다. 서둘러 거두는 오줌 줄기를 빼꼼히 바라보는 여린 풀잎의 항변을 모른 채 고개를 돌린다. 때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오식이*. 세숫대야 속에 앉아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어색한 자맥질을 연방 허공에 해 대는 품새가 날기라도 할 것 같다.

​ 그렇게 본능처럼 봄이 여무는 마당 풍경 너머로 확성기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아날로그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두고 싶은 마음 접어 두고 위에 좋다는 양배추 한 통 살 요량으로 울타리에 희미하게 걸린 사람 소리를 찾아 나선다.

개나리꽃처럼 번지는 볕을 데려온 장사꾼의 목청이 풀리고 있는 공터, 넉넉한 마음을 싣고 가끔씩 찾아오는 식료품 사장은 싱싱한 푸성귀만큼이나 입담 좋은 사람이며 이런 저런 일로 장에 못 가는 노인들에겐 반가운 사람이다. 듬뿍듬뿍 퍼 주는 손에 얼비친 정은 알싸하기까지 하다. 으레 장사 차가 오면 좌판을 벌이는 곳이 이발소 앞 빈 터다. 벌써 이발사 영감을 비롯해 외로운 삶들이 두런두런 모여 있다. 물건을 사려는 마음보다는 방 안의 적막을 떨치고 나온 사람들이다.

주령에 이끌린 노인들 사이로 이발사 영감의 얼굴이 해낙낙하다. 개평으로 얻었을 풋고추 몇 개 그러쥔 손이 흐뭇한 것이다. 막걸리 없이 못 사는 칠십이 넘은 이발사 영감. 그는 업무 중에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발소 벽 물레방아 도는 그림 아래 못 박아 두고 있다. 아마, 저 고추는 이발소가 파한 뒤 적적함을 피해 나온 노인들과 어울려 먹을 막걸리 안주임에 틀림없을 것인데 무슨 볼일이 더 남았는지 할매들 틈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젊었을 때 나름 한가락 했을 외모의 깔끔한 이발소 영감은 할마씨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는 할머니들 중에서 그래도 허리가 덜 굽은 고부댁을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다. 박복의 이력을 지고 사는 고부댁은 젊은 날 남편을 앞세웠으나 팔자소관이라며 허허롭게 사는 사람이다. ​

이발소 영감이 이발이라도 하고 있을라치면 장사꾼에게 하릴없이 이것저것 물으며 기다리는 고부댁은 정갈한 성품 때문인지 눈치가 구 단이다. 오늘은 두 사람이 일찌감치 나와 암호를 주고받듯 흘리는 말이 여간 고소한 게 아니다. 홀아비 심정 과부가 알 듯 고부댁도 매끈한 이발사 영감이 싫지 않은지 바구니에 실한 감자 담듯 입가에 농弄을 담는다. 그때, 슬쩍슬쩍 고부댁의 궁뎅이를 스치고 지나는 영감의 몸짓을 수상히 여긴 송산골 할매가 지팡이를 땅에 두드리며 "마느래 죽은 지 얼매나 되었다고 고놈의 버르장머리 못 내쁠고 또 그런당가. 얼릉 가서 대그빡이나 깎으랑게."하며 일침을 놓는다.

송산골 할매는 이발사 영감이 누님이라 부르며 어릴 적 한동네에서 살았던 사이다. 왕누님의 일침에도 능글능글한 이발사 영감과 장사꾼의 입담은 노란 민들레꽃처럼 피어나고, 따라 나온 동길이*가​ 따분한 기지개를 켜는 공터, 갑자기 동길이가 카랑카랑한 존재감을 동네 어귀까지 흩어 놓는다. 항상 같이 다니는 오리도 꽥꽥거리고 닭은 어디에도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넘성댄다. 이들은 나와 연이 되어 함꼐 사는 식구들이다.

'큰 개나 작은 개 삽니다." 녀석들이 긴장한 건 멀리서 들려오는 개장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개장수의 기름진 외침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가는 동안 곳곳에서 이별에 대한 감당 못할 짖음이 지붕을 뚫고 앙칼지게 흩어진다.

유난히 개장수만 오면 짖어 대는 동길이는 동쪽 길에 버려져 있던 유기견이어서 붙여 준 이름이고​ 오식이는 오순이*의 항렬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오식이의 식자가 밥 식자인지라 먹는 양이 엄청나다. 옛 주인도 오식이가 너무 많이 먹는다며 몸보신이라 하라고 안 겨 준 것을 오순이 벗이 될까 살려 두었었다. 서로 친해진 요즘 가만 보면 드나들 때마다 반기는 것이 보약 노릇을 톡톡히 한다.

어쩌다 한 집에 네 종류의 동물이 한 마리씩 모여 산다. 나 말고는 흰머리 희끗희끗한 오순이가 제일 나이가 많다. 오순이는 오골계처럼 검어서 붙여 준 이름이다. 녀석들은 내 기척이라도 날라치면 내 앞에 서로 오려고 야단법석이다. 잠도 같이 자는 저들은 서로를 보듬는 방법을 알고 있다. 외로우면 품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과 때로는 약간의 상처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리의 목에는 항상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강아지가 외로움을 조근거린 것인데 종種을 초월한 애정 표현인 셈이다. 상처는 굳은살을 있게 하는 것처럼 적적함에 여윈 이발사 영감과 고부댁도 품을 내어 주고 살았으면 싶다. 황혼 결혼이야말로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이고 방 안 가득한 무거운 적막을 삭이는 삶의 에너지가 아닐까.

그런 내 생각을 아는 듯 당신들의 살아온 경험에다 묵근한 정을 얹어 동네에서 제일 어린 내게 한마디씩 내 놓는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적에 짝을 만나야 허네" 매번 들을 때마다 장마당 뒷설거지처럼 긴 여운으로 가슴을 쓸고 지나간다. 주소를 잃어버린 채 흘러 다니는 바람도 누군가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서리고 싶듯 나도, 가끔은 꿈속에서 옆자리를 더듬어 볼 때가 있다.

장사꾼의 입담도 이울고, 잔 햇살 한 줌씩 쥐고 고샅같이 휘어진 세월을 지고 가는 지팡이. 그 무게에 콕콕 찍혀 되살아나는 그리운 사람 냄새, 재봉틀 수리공의 쉰 목소리가 박음질된 공터에 때로는 옹기 장수가 오고 그들을 맞는 계화도 육젓같이 짭짤한 정 많은 사람들이 있어 외로움이 곰삭는 곳, 비어 있어 채울 수 있는 마음의 빈 터에 봄이​ 물들고 있다.

*오식이: 오리 이름
*동길이: 개(발바리)이름
*오순이: 닭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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