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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소리 / 윤자명

부흐고비 2021. 2. 26. 08:40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또 한 차례 아파트 현관이 분주해진다. 수영복이나 체육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혹은 서실書室로 향하고 무슨 강좌나 취미 교실에 참석하러 나가는 주부들의 발길에도 신선한 바람이 인다.

그녀도 활기를 되찾았다. 가끔 찻잔을 놓고 마주할 때면, 이제 제 앞가림하는 자식들이나 직장 일에 바쁜 남편에게나, 자기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 같다던 그녀였다. 중년을 의식하듯 자아 상실과 무기력에 빠져 있던 그녀가 도예를 만나게 된 건 행운처럼 여겨진다.

물을 만난 고기처럼 눈빛엔 생기가 넘친다. 허투루 보낸 시간을 되찾아서 쓰고 싶다고 한다. 가족들에게까지 드리워져 있던 우울의 그림자도 말끔히 걷혔다.

그녀가 만든 풍경風磬을 선물 받았을 때는, 거무튀튀한 색깔에 투박하고 볼품도 없어서 별로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무심히 걸어 두었던 풍경에 바람이 닿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제껏 들어 본 적 없는 맑고 투명한 소리가 그 풍경에서 나왔다.

그녀가 흙을 빚게 된 것은 한 줄기 바람과의 만남이다. 내면의 잠재 능력이 소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듯 “내게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고 말할 때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갈수록 도자기 만드는 일에 신명이 붙는 듯 했다. 어디에 저런 예술성과 감각이 숨어 있었을까 싶다. 깊이 잠자던 소리를 손끝으로 일깨워 내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녀의 첫 작품인 풍경에서 맑고 고운 소리를 들었을 때와 같이 그녀는 또 나에게 신선한 바람으로 와 닿는다.

풍경은 바람이나 무엇에 흔들려야만 소리를 낸다. 바람에 부딪히지 않을 때는 무용지물처럼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바람이 스치듯 인연이 닿아 자기의 소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행복한 일이다. 누구나 한 가지쯤 자기만의 소리를 간직하고 태어났을 것이다. 다만,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소리를 끄집어 내어줄 마중손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뿐이지.

저절로 제 소리를 내는 게 있는가 하면, 외부의 자극이나 터치(touch)가 있어야 소리를 내는 것들이 있다. 종鐘이 그렇고 악기류도 사람의 손이 가해져야 제 소리를 낸다. 영혼까지 우릴 소리라도 쳐주지 않으면 벙어리 냉가슴으로 살 뿐이지 않겠는가.

여러 종류의 소리 가운데서 무한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취하는 자기 소리야 말로 신이 예비해 둔 상賞이리라.

창가의 풍경은 바람이 불 때마다 마음을 깨운다.


 

윤자명 작가는

청송 출생

199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으로 문학계에 입문

2001년 '월간문학' 신인상

제1회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 수필 대상

mbc·금성출판사 공모 역사 장편소설 입상을 했다.

주요 저서로는 '도요 속의 꽃'  '헤이그로 간 비밀편지'  '조선의 도공 동이'  '숭례문을 지켜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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