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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간을 마시는 시간 / 이혜숙

부흐고비 2021. 2. 26. 08:43

 

 

봄에 매화로 시작한 꽃차 만들기는 가을에 국화로 마무리된다.
올해는 극성맞을 정도로 꽃을 찾아다녔다. 매화, 진달래, 복숭아꽃, 민들레, 인동초, 수레국화, 도라지….
가을이 되자 도진 허릿병 때문에 국화차 만들기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로변이나 들판, 산등성이에 얼비치는 노란 빛이 자꾸 눈에 채였다. 결국 곰이 아닌 호랑이를 택하고 말았다. 쑥과 마늘로는 견디지 못해 동굴을 뛰쳐나가 발굽을 차고 달리는 호랑이처럼 바퀴를 굴려 달려갔다.
마침 봐 둔 밤나무 숲이 있었다. 초입에서 몇 포기를 발견했는데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노란 불꽃처럼 활활 타는 산국 군락. 이 정도를 말리려면 열두 개의 채반으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드디어 꽃에 손을 뻗었다.
“아우, 맛있겠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은 역시 혼자 있는 내 귀에 꽂혔다. 순간 흠칫했다. 맛있겠다니! 그러나 그보다 더한 감탄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왕성한 식욕이 치고 올라왔다.
내 손은 어느새 짐승의 이빨이 되어 국화 줄기를 뜯고 있었다. 허기와 갈증으로 눈이 뒤집힐 지경일 때 발견한 먹이처럼 닥치는 대로 손을 뻗었다. 맛있겠다는 말을 뱉는 순간부터 나는 꽃 앞에 선 짐승이었다. 툭, 툭, 투두둑… 배가 고파 한 점 한 점 먹지 못하고 덩어리 채 삼키듯 국화 줄기를 무더기로 꺾었다.
한바탕 휩쓸고 자리를 떠나려니 맞은편 언덕에 그만큼의 군락이 눈에 들어왔지만 발을 돌렸다. 오늘의 양식은 여기까지만.
집에 돌아와 포획물의 일부는 냉장고에 넣고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한 송이씩 꽃을 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성찬을 즐길 시간이다. 아까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것은 잘 차려진 상 앞에서 예의가 아니다. 똑똑, 꽃모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잇새에서 오도독오도독 야무지게 씹히는 소리로 들린다. 싱싱한 꽃은 차로 만들고 만개한 것과 봉오리는 향주머니에 넣을 것이므로 집중해서 선별해야 한다.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꽃송이를 따고 그것이 수북하게 쌓이는 것을 보는 동안 서서히 허기가 잦아든다.
내가 이번에도 넘어가지 못하고 달려간 이유는 바로 이 시간 때문이다. 읽다가 덮은 책의 다음 장이 궁금하지도 않다. 어제까지 살뜰한 정을 바쳤던 드라마 속 남자배우는 영문도 모르고 내게 채인다. 전화를 끊고 나서 후회했던 그 많은 말들도 입속에 가둔다. 집안 곳곳에서 손짓하는 일거리들에게 등을 돌린다. 해야 할 일은 미뤄버리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시간. 꽃이 피는 며칠 동안은 가장 바쁘게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내가 먹고 싶은 시간이다.
손질한 꽃을 씻고 채반에 펼쳐 찌고 말리는 동안 포만감으로 나른해진다. 그 며칠 동안 아무도 안 만났는데 나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난 기분이다. 꽃차를 만드는 내내 그것을 줄 사람들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컴퓨터 앞에서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글 친구들, 화선지를 펼치고 붓을 드는 선생님, 주말에도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면 만날 시간이 없다는 여동생, 하루 종일 마트에서 일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어 퇴근한다는 친구, 그리고 멀리 사는 누군가를 다 만났다.
꽃이 아까워 들판 채 들여오고 싶을 만큼 욕심을 낸 건 혼자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맛있게 먹은 시간을 나눠 주려고 잘 마른 꽃을 병에 담는다.
꽃이 다 져서 다시 보려면 한 해를 기다려야 하는 겨울. 나는 지난봄과 여름, 가을을 당신에게 슬쩍 내밀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기다리는 봄을 먼저 준 것일 수도 있겠다.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날, 잠시, 손을 내려좋고 찻잔을 드는 순간, 따뜻한 시간이 당신의 미음을 적셔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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