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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47 / 김정아

부흐고비 2021. 2. 27. 14:04

기도는 신성한 것이지만 농담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조상님이나 전능한 신에게 기도한다. 기도의 대상이 무엇이건 그 간절함은 숙연하게 한다. 나에게는 ‘47’이 기도의 대상이었다. 내가 가진 실낱같은 신앙심보다 더 큰 힘이 되었다.

어릴 때 살았던 집에 우물이 있었다. 대문을 나와 자두밭을 지나면 부추밭이 있고 그 아래에 우물이 있다. 우물 속은 깊고 어두웠다. 개구리가 헤엄치고 우물 벽에는 이끼가 무성했다. 속상할 때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나뭇잎을 따서 띄우기도 하고 돌멩이를 던져 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 위로는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우물 속은 내가 사는 또 다른 세계였다.

산다는 것은 어깨에 짐을 얹는 일이다. 책임져야 할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은 중력처럼 어느 곳에 있든 마음에 추를 단다. 아래로 가라앉는 일,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일까.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을까. 시골집을 떠나 살면서 우물을 떠올렸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 우물 속에 내가 들어앉아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우물 바닥에 쪼그리고서.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은 마지막 안식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편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방법도 힘도 없었다. 마흔을 맞을 즈음이었다.

스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마흔일곱 살이 되면 모든 것이 잘되고 힘든 마음도 이슬이 마르듯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희망이라는 것이 꿈틀댔다. 사주학의 대가라는 말을 듣고 지인과 함께 찾아온 터였다. 스님은 평온한 인상이었다. 인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인생에서 힘든 때이니 만큼 잘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 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떤 하소연으로도 위로받지 못했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은인을 만난 듯했다. 그렇지만 그때 나에게 칠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하루하루가 근심에 눌려 죽을 거 같은데 칠 년이나 기다려야 하다니….

“스님, 마흔일곱 살이면 먹을 대로 먹은 나이에 무얼 하겠어요?”

그러자 스님은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어느 유명화가도 일흔 살이 다 될 즈음에 나에게 그런 말을 했지. 일흔 살부터 복이 들어온다고 했는데 지금 구십이 넘어서도 그 유명세를 누리고 있어. 마흔일곱이면 애기여, 애기.”

생명수 같은 위로의 말씀을 들은 만큼 복채를 두 배로 드렸다. 그때부터 ‘47’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기도가 되었고 행운의 숫자가 되었다. 죽을상을 하다가도 곧 도래할 마흔일곱 살의 행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속상하고 억울해도 그날이 되면 다 잘된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참자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칠 년의 시간은 가끔은 초침처럼, 가끔은 시침처럼 나를 훑고 지나갔다. 2000년 밀레니엄이 도래하면 세상이 어마어마하게 바뀔 것이라고 했지만 변화를 느끼지 못했듯 나의 마흔일곱 살도 그렇게 지나갔다. 나를 둘러싼 문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었고, 하는 일도 썩 좋아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렇게 기다리던 마흔일곱 살에 대한 실망감이 더 우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운세나 사주 같은 것을 보고 찾아가 AS를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보니 그저 현혹된 자신만 탓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스님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지인을 따라나선 길이지만 나름 믿지 못할 위로라도 듣고 싶었나보다. 스님은 다시 나의 생년월일을 묻고 두꺼운 책을 뒤적이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부인 사는 게 힘들죠. 앞으로 십 년 정도는 계속 힘들 것 같은데, 이 시기를 잘 견디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거예요. 사람이 힘들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며 열심히 살면 됩니다.”

그러면서 조심할 사항들을 일러주었다. 일단은 현재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스님의 의견을 듣고 나왔다. 예전에 했던 스님의 말과 달라 따지고 싶었지만 위세에 눌려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궁금함에 전화를 걸었다.

“스님, 예전에 제가 마흔일곱이 되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 하시더니, 다시 십 년이 더 남았다고 하시네요. 제가 잘 못 살아서 십 년이 더 늘어났나요?”

그러자 스님은 허허 웃으시며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때 부인의 마음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그랬을 겁니다. 그래도 그때보다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요?”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다. 마흔일곱 살에 공부방을 차려 독립을 했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심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뭔가 배신당한 느낌은 저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스님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칠 년이라는 시간 동안 ‘47’만을 생각하며 무엇을 바라왔을까. 깊은 우물에 쪼그리고 앉아 밖에서 황금빛 두레박이라도 내려올 줄 알았을까. 늘어나는 숫자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라도 만들어줄 거라고 믿었을까. 침묵으로 기다리면 불편한 세상이 아름답게 변할 줄 착각했던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게 왜 너그럽지 못하냐고 소리치며 적극적으로 대처했어야 했다. 그저 조신하게 기다리면 오는 마흔일곱 살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물 밖으로 나가 두레박을 던져야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스님은 내게 앞으로 힘든 십 년을 보낼 지침을 말해줬으나 이제는 그 반대로 살아보리라. 좀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웃음이 난다. 어쨌든 나는 잘 살아 냈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앞으로의 시간도 그리 힘들 것도 없겠다. ‘47’, 이 얼마나 유쾌한 농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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