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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사우나 풍경 / 엄현옥

부흐고비 2021. 2. 26. 17:01

문을 밀고 들어서니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말이 유난히 크다. 수건을 건네는 표정도 애써 친근함과 고마움을 전하려는 기색이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에 새삼스럽다. 사우나가 서비스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탕 안은 잠잠하다. 평소에는 일부러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만을 택해 다니곤 했는데 혼자라니 도리어 머쓱해진다. 적막을 깨며 물소리를 내기도 망설여질 때, 냉탕에서 인기척이 났다. 한 사람이 또 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한적할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일까?

얼마 전, 주인은 그다지 친숙하지도 않은 내게 하소연했다. 가까이에 대형 사우나가 개업을 앞두고 있는데 손님을 빼앗길 것이 걱정된다고 했다. 우리집에서도 신축 건물의 사우나가 훨씬 가까울 텐데 굳이 발품을 팔며 낡은 시설의 이곳까지 오겠느냐는 것이었다.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렇게까지 큰 지장이 있겠느냐는 의례적인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사실 그의 걱정이 기우일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우나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일, 그것도 옷 벗고 하는 혼자만의 휴식에, 익숙한 곳을 두고 번듯한 새 것이 들어섰다고 모두 그곳으로 몰려가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주인의 하소연대로 빌딩공사는 하루가 다르게 진척되어가더니 급기야 지난 주에는 사은품에 3일간 무료입장이라며 호객에 나섰다. 길 양쪽에 사우나를 두게 된 우리 집의 위치는 양손에 떡을 쥔 형국이었다.

밤만 되면 빌딩의 사우나는 원색의 네온으로 윙크하며 나를 유혹했다. 아마 그곳에 가면 인산인해, 말 그대로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있을 터일 것이다. 그러나 새집 증후군에 대한 우려가 만발한 요즘 굳이 새로 지은 탕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곳은 내 집처럼 편안했다. 휴일이면 탕 안에는 엄마 따라온 아이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아예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도 많았다. 수면방은 동네 아줌마들의 사랑방이 되곤 했는데, 휴식에 방해될 정도의 큰 소리로 오가는 대화 내용은 늘 비슷했다.

차라리 ‘수다방’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듯한 이곳의 이야기꾼들이 매번 같은 사람들은 아닐 텐데 신기한 일이었다. 자식은 대견하고, 남편은 갈수록 시큰둥해지고, 친정은 잘 살았으되 시댁은 늘 어려운 형편이었다는 것으로 정리되곤 했다. 그러다가 말끝에는 자식에게 바랄 것이 없는 세상이니 그저 부부 건강한 것이 제일이라는 식상한 결론으로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
이때쯤 되면 기다란 이야기를 늘어놓던 장내가 한풀 꺾이곤 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이 사라지는 그녀들은 ‘떠날 때는 말없이’의 묘미를 아는 여인들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삶의 철학을 토로하던 이 방도 역시 고요하다. 수면방은 의구하되 아낙들은 간 데 없으니 세상사 무상함을 읊던 옛 선비의 심정으로 잠시 눕는다.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손님이 없다. 지겹다고 생각했던 그녀들의 수다가 늘 피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을까. 평소에는 소음과 속보(速步)에서 잠시 벗어난 혼자만의 공간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처럼 허망하다. 간혹 손님 없는 시간에 맛본 상쾌한 고요와는 뭔가 다르다.

이미 대세는 기운 것이다.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지 못한 나만 남겨두고 모조리 개업한 곳으로 몰려간 것이 틀림없다. 인심의 허망함을 탓하며 수면방을 나온다.
건식 사우나에 들어서니 온 몸이 따갑다. 지나친 열기로 잠시나마 눈을 뜨기에도 불편하여 금방 튀어나온다. 나는 열기를 참을 수 없어 의리에 죽고 사는 서부의 총잡이가 되어 찬 물줄기를 조절하는 레버를 권총의 방아쇠인 양 잡아당긴다.

최신 시설로 발길을 옮긴 그녀들을 응징하는 보안관처럼 한 번 더 세게 당긴다. 찬 물 세례로 정신을 수습한다. 심호흡을 한 후 이번엔 습식 사우나의 문을 연다. 오래 있어도 지치지 않을 듯한 은근한 온기가 전해진다. 이곳에서라면 쉬어갈만 하겠다.
그런데 내가 굳이 이곳을 찾은 것은 오랫동안 다녔던 사우나에 대한 일편단심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30매의 입욕권을 미리 구입해 사용하는 중이므로 당분간은 예전처럼 이곳에 올 것이다. 그러다가 남은 입장권을 다 소비하고 나면 새롭고 큰 시설을 향해 우르르 달려가는 그들과 나는 어떻게 다를까 생각해 본다.

바람만 불어도 고개를 돌리는 세상의 인심을 탓했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엄현옥 수필가는

1958년 장흥군 장흥읍 생 

1995년 인천문단 수필부문 대상, 1996년 [수필과 비평]신인상, 1999년 제물포 수필 문학상 

2001년 부총리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표창, 2003년 인천문학상 수상, 2005년 신곡문학상 수상 

*수필집<다시 우체국에서>문학과'98, *수필집<나무> 수필과비평사'03, *수필집<아날로그-건널 수 없는 강>, -수필과비평사'04, *공저<봄날은 간다> -<가끔 외줄을 타고 싶다>외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인천지역사무국장, *수필과 비평 편집위원, *수필과 비평 작가회의 사무국장, *제물포수필문학회 부회장, *인천수필시대 회장, *문화예술 장흥 동호인회 회원 

*인천문학상, 신곡문학상 본상, 인천 PEN 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고등국어 교과서(더 텍스트)에 수필 「얼룩동사리를 생각하며」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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