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뭐가 이카노 / 하재열

부흐고비 2021. 2. 27. 14:11

수잠이었다. 몇 번을 뒤척였다는 것과 꿈도 꾸었다는 생각을 해낸다. 화를 낸 듯 나를 바라보는 늙은 얼굴과 말 건네며 활짝 웃는 얼굴의 두 사람이 보였다. 웃는 여자 쪽이 오래 등장했고 손도 잡고, 좋은 말도 나눈 것 같았다. 새해 첫날밤인데 그 꿈 괜찮네 하다가 다시 잠이 든 꿈결이었다.

“뭐가 이카노.” 옆구리를 맞았다. 꿈인가 했는데 아내 팔꿈치였다.

“와 이카노.” 얼떨떨 물었다.

내 한쪽 손이 밀쳐내 졌다는 걸 느끼고는 뭔가 싶었다. 아내 배꼽 아래 언저리에 손이 가 있었던 모양이다. 모처럼 한 침대에 누웠다가 잠결에 그리되었는데 주책없다는 뜻인 것 같아 피식 웃었다. 녹이 다 슬어 작동이 어려운데 옛날 신호가 살아난 줄로 착각했나 보다. 오작동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이래저래 잠이 깨어버렸다. 커튼에 스미는 희붐한 빛을 보니 날이 새고 있는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커튼 자락을 밀치고 내다보았다. 어스름 바다가 확 달려든다. 초롱초롱한 별빛이 창공에 박혔고, 멀리 깜박이는 불빛들은 고기잡이배로 짐작했다.

며칠 전 딸애가 해돋이 보러 가자고 했다. 영일만의 전망 좋은 호텔 방을 예약해 놓았다고 했다.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어인 일인가 하며 따라왔다. 여태 바닷가 해돋이를 본 적이 없다. 오래전, 처음 해돋이 본다고 새벽에 나섰다가 경주 덕동댐 지나 감포 가는 길의 깊은 산협에 갇힌 채 중천에 뜬 해를 보았다. 얼어버린 길이 쏟아진 차로 막혔고, 그때 오들오들 웅크린 군상들이 흡사 군집으로 몰려다니는 들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 도망갈 해도 아닌데 왜 이럴까 싶었다. 그때도 나와 아내는 ‘뭐가 이카노’와 ‘와 이카노’를 주고받았다. 그 후로는 가지 않았다. 덧없는 일로 여겼다. 제야의 종이라며 야단을 쳐도 평소대로 이불을 덮었다. 아내는 목석이냐 했다.

한층 더 희붐해졌다. 수평선 넘어 붉은 기가 하늘에 배여 물들어 온다. 이상하게도 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 내려다보니 해변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점점 많아져 간다. 아내도, 옆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난 딸애도 매무새를 고치고 옆에서 붉어 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방 안에서 새해의 해를 맞이한다는 게 왠지 미안스럽고 불경스럽다. 덧없는 일이라 했는데 이건 무슨 느낌일까. 태고의 때, 인간의 자연에 대한 외경의 유전 형질이 내 망막에서 살아난 것 아닌가 했다. 밖에 나가서 보고 오겠다며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편안하게 일출 보라고 높은 호텔 방 잡았는데 왜 그래요? 나는 추운 데서 떨며 그런 해돋이는 안 볼래요.” 딸애가 톡 쏜다.

“별일이네. 여기가 훤히 더 잘 보이겠는데 그러네.” 협곡에서 함께 갇힌 적 있는 아내가 거든다.

“그래도 새핸데 밖에 나가서 보지 않을래?” 편리함이 유전 형질도 바꾸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생각을 떠보았다. 딸애와 아내는 ‘뭐가 이카노’였고 나는 ‘와 이카노’였다.

그렇게 춥지 않겠다는 일기예보완 달리 바닷바람은 칼날이었다. 모자 위에다 방한복 모자를 덧씌우며 바람을 막았다. 등 뒤에서 던지는 딸애의 말엔 내가 따라올 때 생각했던 신호를 감지할 수 없었다. 파도가 여명을 가르며 쉼 없이 밀려와 철썩댄다. 시원의 소리였다.

젖은 모래 곡선을 따라 사람들이 몰려 줄지었다. 뒤쪽 모래 벌이 끝나는 언덕에도 더 긴 줄을 이었다. 언덕 한 곳에 발을 디밀어 얹었다. 하늘이 더 붉어져 갔다. 앞쪽 줄에 선 사람의 어둑한 뒤 모습들이 붉은 하늘 바라보며 무슨 게시라도 기다리는 구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술 소리가 울리는 굿판을 둘러싼 사람의 무리 같기도 했다. 내 옆으로는 모두 볼이 상기 되었고 입에 하얀 입김을 물었다.

드디어 해가 솟아오른다.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어 눌러대며 수많은 해를 가두었다. 옆 청춘의 쌍이 껴안은 채 뽀뽀를 해댄다. ‘쪽’ 소리가 별스럽다. 해맞이를 이렇게도 하는구나 싶은데 얼떨떨하다. 두어 군데서 그래놓고는 환호를 지른다. 자리는 좋은 데 잡은 것 같은데 민망하다. 늙수그레한 이들의 경건함은 혼미해졌고 해를 향한 경외감을 느낄 겨를을 빼앗겼다. 나는 ‘뭐가 이카노’였고, 청춘은 쳐다본 나에게 ‘와 이카노’에다 ‘와 이래 좋노’였다. 붉은 해를 쳐다보는데 눈이 부신다. 다짐할 말은 있었는데 젊은것들의 일로 버벅거리다 말았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쳐다만 보았을 옛 토인들의 그 해를 경배한다며 나누어 뜯어먹고서다. 앞으로 백 살까지 산다는데 나의 ‘와 이래 좋노’는 ‘황성옛터’의 가락이 되었고, 언제부턴가 ‘이 우짜머 좋노’가 되었다. 파도가 거품 물고 이 작자야! 그 나이에 지금대로만 해라. ‘와 이래 죽겠노’ 가 되면 어쩔래 한다. 그러네, 일출의 화두 하나 건졌다. 내가 대꾸했다. 그런데, 진정 나의 ‘이 우짜머 좋노’는 내 낡은 신호기에 기름칠하는 그 일이 아니란 말이오. 모래판의 수많은 그 젊은 발자국 위로 쓸리는 파도를 보며 주술처럼 ‘와 이래 좋노’와 ‘이 우짜머 좋노’를 읊조렸다.

방 안 온기는 별세상이다. 바다를 건너 창으로 밀려온 햇살이 눈 부시다. 끝내는 어제와 오늘이 같은 일상이다. 간단없는 시간의 흐름이련만, 이것은 굿판 같은 해돋이 놀이로 시간에 매듭을 지어야 안심을 하는 인간의 여린 마음이 만든 덧없는 신기루다. 하지만 그 신기루가 있어 오늘까지 덜 지겹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해가 수평선에서 껑충 올라왔는데 곧장 들어오지 추운데 뭐하다 이제야 오느냐며 아내가 입을 댄다.

“이 우짜머 좋노” 하다 왔다.

“……? 뭘 잘못 봤어예, 와 그래요.”

내 얼굴을 뜯어보고는 늦게 알아차린다. 미안해한다.

바깥 바람맞고 들어오니 방 안에 게맛살 냄새가 돈다. 어제저녁 강구에서 거하게 딸애가 사주었던 찜 대게의 흔적이 묻어온 거다. 해보러 가자고 했을 때 혹시 ‘와 이래 좋노’ 가 들리려나 했는데, 지금 나는 ‘뭐가 이카노’ 다. 신기루의 실상을 미리 터득하고 ‘쪽’ 소리를 영 묻은 건 아니겠지 한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 할매 / 허창옥  (0) 2021.02.28
입, 주름을 말하다 / 김인선  (0) 2021.02.27
47 / 김정아  (0) 2021.02.27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면 / 정경희  (0) 2021.02.26
사우나 풍경 / 엄현옥  (0) 2021.02.2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