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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수첩 / 조일희

부흐고비 2021. 3. 2. 08:45

서랍을 정리하다 말고 방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차곡차곡 포개진 수첩들이 눈에 들어와서다. 어느 해는 하늘색으로, 어느 해는 갈색으로 압축된 지난날들이 한 뼘이 넘는다.

맨 위에 있는 수첩을 펼쳐본다. 수첩 곳곳에는 여행의 흔적, 기념일의 분위기, 우울한 날의 표정까지 삶의 부스러기들이 마른 잎사귀처럼 납작하게 눌러져 있다. 단정한 글씨는 고요하게 맑은 마음이었을 테고, 휘갈긴 글씨는 찌뿌둥하게 흐린 마음이었을 테다.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수첩은 여백이 많아진다. 새해에 가졌던 야무진 마음이 헐거워진 탓이리라. 몇 장 더 넘기자 눈에 익은 이름과 연락처가 길게 나열돼 있다.

일전에 구호활동가인 한비야 씨의 글을 읽으며 몹시 공감한 적이 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묵은 짐 정리와 마음 정리로 마무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연말에 그 해 쓴 일기를 읽으며 감사할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용서를 구할 사람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사람은 통 크게 용서한단다. 상대에게 직접 용서를 구한다는 그녀가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를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맞는 새해는 얼마나 개운하고 홀가분할까.

나도 나만의 송년 의식이 있긴 하다. 바로 수첩 정리다. 세밑이 되면 월동준비 하듯 새 수첩을 장만하러 단골 문구점엘 간다. 간택을 기다리는 처자들처럼 고운 자태를 뽐내며 수첩은 한쪽 칸에 모여 있다. 어느 집 규수인가, 얼굴은 모나지 않고 수수한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몸매인가. 꼼꼼히 살펴보고 고르지만 거개가 예년에 쓰던 것과 비슷한 모양을 고른다. 어느 해, 화려한 겉모습에 반해 고른 수첩을 상전으로 모신 적이 있어 그 후로는 수더분하지만 제 할 일을 다 하는 무난한 수첩을 택한다.

신중하게 고른 수첩을 앞에 두고 생각이 많아진다. 지난 수첩에서 새 수첩으로 이름을 옮겨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그물망을 아무리 느슨하게 해도 걸러지는 사람이 의당 생긴다. 주소록 앞자리를 차지하는 가까운 사람, 의례적으로 만나는 관계이지만 주소와 연락처가 꼭 필요한 사람, 지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게 되는 사람, 이제는 지울 수밖에 없는 사람 등, 명단의 이름이 정거장을 오가는 이들처럼 마음속을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앞줄에 있는 이름을 지워야 할 때면 더욱 심사가 복잡해진다.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관계를 정리한다는 뜻이어서 그렇다. 통신기기가 발달한 요즘은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낯붉히지 않고 오랜 관계도 일순간에 끊을 수 있다. 게다가 내 쪽에서 상대의 이름을 지워도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니 얼마나 친절한 작업인가. 하나 이 쌀쌀한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다. 혈관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이보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 사람을 수첩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다. 같이 했던 행복한 시간과도, 함께 나눴던 따뜻한 마음과도 일별을 고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칼로 무 자르듯 단칼에 자를 수 없는 게 사람의 연(緣)인지라 우선 주소록 끝에 이름을 올린다. 몇 년을 수첩 한구석을 차지하다 끝내 시절 인연으로 남는 이름이 해마다 생긴다.

가끔 안부가 궁금한 이가 있다. 이름만 생각날 뿐 연락처나 주소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이미 멀어진 사이다. 어찌어찌 수소문하면 알 수도 있으련만 그마저도 저어된다. 상대의 수첩에서 내 이름이 지워졌을지도 모르기에 그렇다. 더 안타까운 것은 왜 소원해졌는지 그 연유가 도통 생각나지 않아서다. 어쩌면 내 잘못으로 소원해졌을 수도 있기에 한 해를 깔끔하게 마무리한다는 한비야식 송년 의식이 새삼 부럽다.

이제 살아온 세월 수보다 살날을 세는 게 빠른 나이다. 이래저래 주소록에 새로운 이름이 보태지기보다는 지워질 이름이 많아질 나이이기도 하다. 흐르는 물처럼 오고 가는 관계가 자연스러운 건지, 오래 묵힌 장처럼 곰삭은 사이가 자연스러운 건지 수첩에 쓰인 이름들이 내게 숙제를 내준다.

12월이다. 세월과 사람을 생각할 때이다. 옮길 것인가 지울 것인가 고민할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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