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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중

모란은 봄을 보내며 피는 꽃이다. 늦은 오월에 피어 봄의 막바지를 장식한다. 꽃은 계절을 상징하고, 그 꽃이 있어 계절은 한층 계절답다. 모란이 피우는 자홍색 꽃엔 처연함마저 묻어난다. 무어 그리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지 붉고 붉다. 진달래도 지고 목련과 수선화도 피었다 진 때에 짙게 피어서는, 봄의 끄트머리를 아로새긴다.

공단 결처럼 보드라운 모란 꽃잎은 얼핏 보아 종이꽃 같다. 생화인지 조화인지 잠시 헷갈린다. 만져보면 꽃잎의 감촉은 아기 살결처럼 보들보들하니 생명을 머금었다. 조용한 강촌이나 한적한 시골집 흙 담 아래 혹은 사찰 주변에서 그곳 토박이처럼 잘 어울린다. 어른 주먹만큼 크고 탐스러운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자태가 새색시마냥 조신하고 다소곳하다.

모란은 영랑 이전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설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선덕여왕이 향이 없을 거라고 예견한 것과는 달리 향이 없지 않다. 정말로 향이 없을까 하는 호기심은 종종 꽃에다 얼굴을 갖다 대고 향을 맡아보게 했다. 놀랍게도 “꽃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철에 피어야 한다.”던 지조의 모란은, 지조만큼 짙고 깊은 향기로 제 존재를 알려왔다. 은근한 향취에 아롱아롱 취할 만큼이었다. 역사의 진실인 양, 모란에는 당연히 향이 없을 거라 익히 들어온 믿음이 모란꽃 향기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모란은 모양이 풍성하고 우아하여 꽃 중의 왕이라 불렸다. 병풍 속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불교에서는 부처께 올리는 꽃 공양 중에 모란을 첫째로 치고, 그 다음으로 연꽃과 황국을 꼽았다. 정이품 이상 고관대작의 흉배에만 수놓일 수 있었던 꽃이었다. 모란꽃이 그려진 액자는, 부귀화라는 이름 덕에 이사한 집에 선물하는 목록 중 단연 우선순위였다. 과연 모란이 지닌 덕을 알 것 같다.

영랑이 애틋하게 우러르던 모란은, 그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이며 사는 보람이었다. 모란이 지고 나면, 차마 보내기 싫은 봄을 완연히 놓아주며 봄을 여의는 설움에 잠겼다. 그것은 이제는 봄을 보내야 한다는 다짐이며, 봄도 한 해도 다 보내는 허망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긴긴날 기다렸던 모란꽃이 어느 날 뚝뚝 떨어지면 한 해가 다 간 듯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며. 그러나 영랑은 다시 다가올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렸을 것이다.

영랑의 봄이 슬픈 것은 한 소망이 져버린 것에의 맥 풀림이었다. 이듬해 모란이 필 때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 막막한 일이자 지루한 기다림이다. 무엇을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그 일이 얼마만큼의 참을성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우리가 사는 나날은 기다리는 일의 연속일 터, 사람을 기다리고 절실한 무언가를 기다리며 참는 법을 익혀간다.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만큼 성숙해진다는 뜻이다. 영랑에게 모란은 그 많은 기다림을 견디게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기다림 중에서도 가장 슬픈 기다림은,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일이다. 삼백예순 날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만남이 어긋난 적 있다. 약속한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떠나갈 동안 나만 붙박이 의자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하마 올 것 같은 순간이 금세 한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허물어지지 않던 약속의 기대로 혹시나 하고 뒤돌아보며 발길 돌릴 때의 안타까움이 컸다. 영랑이, 남달리 좋아하던 모란이 진 후 뻗쳐오르던 삶의 행복까지도 무너지는 섭섭함을 맛보았던 심정처럼. 지귀설화 속, 지독히 사모했던 선덕여왕과의 만남이 어긋나 불타버린 지귀의 마음처럼.

애틋한 기다림은 또 있다. 신라 때 박제상은 시대의 충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눌지왕의 명으로, 볼모로 가 있는 왕의 막내 동생을 구하러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왕의 동생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자신은 붙잡혀 돌아오지 못한다. 이 소식에 제상 부인은 통곡하며 망덕사(경주 소재) 절 앞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역사는 제상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고 전한다.

박제상은 한 나라의 충신이었지만 그 가족에게는 다만 남편이며 아버지였던 것이다. 망망한 바다만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 속이 까맣게 탔을 역사 속 이야기에, 천 년 세월에도 아랑곳없이 가슴 저리다.

제상 부인의 기다림은 해소되지 않을 영원한 기다림이었다. 반면 영랑의 봄은 다시 기약할 수 있는 봄이다. 그에게 모란은 모란꽃 그 자체인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대표하는 꽃이다. 그의 봄이 결코 절망적인 “슬픔의 봄” 만이 아닌 까닭도, 봄이 오면 모란은 또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모란이 활짝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슬픔의 봄이 아닌 찬란한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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