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멧돼지 이야기 / 이호상

부흐고비 2021. 3. 3. 12:43

어렸을 때 고향에는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젊어서부터 산짐승 잡기를 익혔다. 짐승들이 잘 다니는 길목을 짚어 산 구석구석에다 덫이나 올가미나 낚시를 설치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순회하면서 걸려 죽은 짐승들을 수거하였다. 족제비, 너구리, 오소리나 여우는 창자와 살코기와 뼈를 발라내어 고기는 먹고 모피를 말려 팔았다. 노루와 멧돼지는 고기를 팔았다. 마흔다섯에 일을 당하기까지 이십여 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짐승들을 그 사람이 죽였다.

그날도 길목을 살피러 산을 돌다가 멧돼지 한 마리가 올가미에 걸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큰 송아지만 하였다. 그는 희색이 만면하여 혼자 소리를 질렀다. 올가미를 벗기니 아직도 몸이 식지 않았다. 그는 지게에다 실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돼지를 굴렸다.

그때 멧돼지가 움직였다. 굴리는 바람에 올가미에 졸렸던 숨통이 트인 것이다. 놀란 그는 지게 작대기로 마구 두들겨 팼다. 살아난 멧돼지는 처음에는 달아나다가 되돌아서서 한참을 노려보더니 그야말로 설맞은 멧돼지가 되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떠받쳐 쓰러진 그를 물어뜯고, 밟고, 굴리다가,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뜨리고 내려와서까지 공격하였다.

하루 뒤에 벼랑 아래 쓰러져 명줄만 붙어있는 그를 사람들이 찾아냈다. 그의 얼굴은 물린 상처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온몸이 흉터투성이고 곰배팔이가 되었고 다리는 부러져 심하게 절었다. 그는 멀쩡한 날보다 멍하게 얼이 빠져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 그 가족들도 동네에 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말 못 하는 불쌍한 짐승을 해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믿음을 굳히게 되었다. 동네회의를 열어 그 사람이 변을 당한 골짜기를 돼지 골이라 명명하고 앞으로는 사람들이 기르지 않는 야생짐승은 잡지 못하게 규약을 정했다.

증조모님은 지나칠 정도로 이런 일에 엄격하셨다. 언젠가 아버지가 산에서 꿩 알 열 개를 주워왔다. 할머니는 알을 잃어버린 까투리가 철을 놓치면 금년에는 병아리도 못 깔 턴데 얼마나 불쌍하냐며 당장 제자리에 갖다두고 오라고 호통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몇 년 전에 친구들이랑 가평 명지산 아래 음식점에서 민박을 했다. 밤에 주인이 와서 산짐승 탕을 먹지 않겠냐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무슨 짐승이건 냉동된 것이 있다고 했다. 너구리와 멧돼지 새끼는 살아있는 것도 있었다. 네모난 철망에 갇힌 너구리는 이미 탈진하여 움직이지도 않고 겁먹은 눈동자만 껌벅였다.

돼지 새끼 두 마리는 함정을 설치하여 잡아놓고 손님이 연결될 때를 기다리며 우유로 키우고 있었다. 어미 멧돼지는 새끼가 잡힌 지 두 달이 넘은 지금도 하루에 한 번씩 밤중에 새끼를 구출하려고 그 집 가까이 내려온단다. 주인은 어미마저 잡으려고 새끼가 있는 우리 주변에 함정을 파서 유인하였으나 돼지는 귀신처럼 피해 다닌다고 자랑인 양 얘기했다.

방송에서 야생동물을 밀렵하거나 또 냉동해서 판매하는 장면을 본 일이 있지만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철망에 갇힌 너구리의 겁먹은 눈동자와 집주인의 살기 어린 눈이 자꾸 비교가 되었다. 직업에 따라 사람의 얼굴 모습이 다르다더니 그의 얼굴은 참으로 간교하고 잔인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아마 산짐승을 많이 도살했기 때문에 그러한 얼굴이 되지 않았을까.

이튿날 우리는 방값만 치르고 밥은 다른 집에서 사 먹었다. 산행에서 내려오는 길에 가평경찰서에 들려 고발하였다. 며칠 후 경찰서에 확인했더니 눈치를 챈 주인이 말끔히 치워버려 증거를 찾지 못했단다. 그날 등산을 하지 말고 바로 신고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몇 년 후 다시 그 동네에 갔을 때 아랫동네 음식점에서 나는 무서운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다녀가고 한 달쯤 후에 어떤 중년의 미식가 부부가 멧돼지 새끼를 먹으러 그 집에 왔다. 탕으로 먹는 것이 좋다 하여 내가 보았던 그 새끼 두 마리를 잡아 가마솥에 안치는 것까지는 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밤중에 가스통이 터져 그 집에 불이 났다. 천지가 진동하는 폭발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목조 건물이 내려앉은 뒤였다. 119 소방관들이 잿더미 속에서 불에 탄 시신 네 구를 찾아냈다. 탕을 먹던 손님 부부와 주인 내외였다. 그리고 가스통이 터진 옆에 중 송아지만한 암놈 멧돼지 한 마리가 폭발에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죽어 있었다.

소방서는 화인을 가스 취급 부주의라 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불이 난 그 시간에 멧돼지가 왜 거기 있었을까. 제 새끼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어찌 사람에게만 있을까. 마을 사람들 누구도 불에 탄 시신을 보고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죽은 멧돼지가 안타깝게 생각되어 마을 사람들은 두고두고 얘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마을에는 새끼를 구하러 왔던 어미 멧돼지가 달려들어 주둥이로 가스통을 떠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옛날 같으면 입에서 입으로 멧돼지를 미화한 하나의 전설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동네에는 돼지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담이설才談異說 / 임병식  (0) 2021.03.04
아름다운 실버를 위하여 / 김학  (0) 2021.03.03
모과 / 최원현  (0) 2021.03.02
낯익어 서글프다 / 유한근  (0) 2021.03.02
수첩 / 조일희  (0) 2021.03.0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