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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한약방 / 김경실

부흐고비 2021. 3. 8. 12:51

‘고향의 감초맛’이 낯설었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촘촘히 들어찬 시멘트 건물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좁디좁았던 골목은 시원스레 넓혀졌고 아스팔트 대로변엔 주차된 차들이 생경스런 풍경을 이루고 있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 이란 고사가 있듯 이곳은 나와 내 가족 생존의 터전이었고 인심 좋기로 이름난 꿈에도 그리던 곳이었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고 그 사이 산업화가 되었다지만 이리 번화하고 낯선 곳이 되어 버릴 줄이야….

옹기종기 내려앉은 초가집에 흙먼지 나던 그 시절 자갈길이 그리워진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고속버스로 서너 시간이면 갈수 있는 고향이지만 마음에만 담아둔 채 몇 십 년 발을 들이지 못하였으니 지형조차 변해버린 고향산천이 어찌 낯설지 않겠는가, 문화원 행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할아버지 한약방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주차장에서부터 난감하기만 했다. 변하지 않은 곳이 없어 얼마를 헤매고 묻고 물어 해나무골 ‘김만이 한약방(지금은 상호도 바뀐 할아버지 약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림:이예숙(웹에서 발췌)

경주 김씨 대소가(大小家)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근 육십 년이 넘었으니, 상호며 외관까지 바뀌어버린 그 시절 한약방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할아버지께서 한약방을 시작하셨으니 그 역사가 일세기가 되어간다.

고향에는 팔경이 있다. 그중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은 김유신 장군 사당인 당제, 자연과 맞서지 않고 어울리며 천년을 견뎌온 농다리, 또 하나는 용하기로 소문난 할아버지 한약방이다.

할아버지 한약방은 유난히 잔병에 시달리던 내 유년의 피접처였다. 지금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갖가지 질병을 달고 살았는데 횟배앓이, 하루건너 고열에 시달리던 하루거리, 환절기마다 곱불에 잔기침이 떠나질 않았었다.

사시사철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락거리는 내게 “또 왔니?”하시지 않고 어느 때부터는 먹거리부터 챙겨 주셨었다. 분이 뽀얗게 핀 찐 고구마과자, 인절미, 그리곤 “체할라, 물마시고 먹거라”하시며 할아버지만 드시던 ‘갈수(과일즙이나 꿀을 한약재와 혼합해 달인 물)’를 따라주셨다. 알 듯 말 듯한 그 갈수 맛이며 약방 곳곳에 배어있는 표현키 어려운 캐캐한 냄새…. 두꺼운 세월의 벽에도 언뜻언뜻, 얼굴을 내미는 순수한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할아버지대에서 손자대로 이어온 늙은 한의사가(오빠)가 열심히 환자와 상담중이다. 할아버지는 가정집 그대로를 약방으로 활용하였는데 이제 그 모습은 간 데 없다. 외관도 산뜻하게 실내도 편리 시설을 갖춘 도시의 여느 한의원과 다를 게 없다.

이 묘한 기분은 무엇일까, 자꾸 둘러봐도 어색하기만 해 대기실을 나와 나무아래 앉았다. 여기 오면 신기하게도 온갖 병이 씻은 듯 나았었다. 할아버지의 영험한 손끝이 아픈 육신의 혈을 찾아 꼭꼭 누르면 나도 모르게 시원함을 느꼈던 기억, 침놓은 자리에서 조금 새어나온 피를 보아도 두려움 없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다 나았다, 용타 용타”하시며 내게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곤 입에 쏙 넣어주셨던 그 감초 맛도….

인간의 두뇌는 우리를 편리하게 조정하고 아름답게 성장시켜 준다. 켜켜이 쌓인 삶의 편린 중에 지금 이 순간 내게 필요한 것만 기억하게 해준다. 마치 아름다운 꽃을 꽃병에 꽂을 때처럼 순수하게….

작두로 약재를 열심히 썰며 가끔 내손에 감초를 쥐어주던 오빠는 열이 빨리 식어야 병이 낫는다며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멍석에서 말라가던 노란 인동초 꽃, 산국, 개똥쑥, 당귀, 그것들의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고, ‘징글벨’이며 요제프 신부님이 곡을 붙인 그뤼비의 ‘고요한 밤’을 같이 부르던 오래된 마당에 나와 섰다.

할아버지와 한약방, 낡은 선비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빛바랜 서적들, 꿰꿰한 옛날 냄새, 이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고 약손의 전설을 잇게 해주는 것들이 아니던가.

과거와 현재는 서로에게 윈윈(win win)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듯 행복도 행복의 뇌를 잘 이용해야 행복하다고 한다. 아담의 창조 이래 낙원에서 추방된 후예들은 신의 노여움으로 가난과 질병과 같은 노역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메디치 가문은 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성모의 모습을 첫 번째로 조각하게 하였을까? 속죄의 의미로 만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비의 어머니, 구원의 여신상을 조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현대인의 트라우마에 행복의 뇌를 생성케 하는 성모의 손길만큼 절실한 게 또 있을까….

우리시대 최고의 화두는 행복이다. 약을 먹지 않고도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야 비로소 행복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다.

할아버지대 ‘한약방’에서 손자대 ‘한의원’ 세대 사이에서 나는 우주적 상상력을 동원해본다. 손목의 혈에서 지혜, 철학, 마음을 담아 침묵하며 사유하고 긍정을 주던 인술 할아버지의 철학과, 현대기술에 의해 육체 곳곳을 유영하며 신비의 소리에 응답하고 원인을 찾는 현재의 한의학과의 혼합, 이것이야말로 전 인류의 유쾌한 요구가 아니겠는가!

욕망에는 분별이 없다. 리빙윌(Living Will,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피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한 선언)을 써놓고 백수를 한들 어떠랴. 우리는 이제 우주적 상상이 아닌 의학적 응답을 기다릴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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