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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밤과 난蘭 / 김경실

부흐고비 2021. 3. 8. 08:54

우수가 지났는데도 봄은 아직 멀리 있다. 우리 아파트에 난실은 별도로 없어도 따뜻한 실내가 겨우내 산실 역할을 해주어서인지 춘란이며 풍란, 춘백 그리고 내 키만큼이나 자라 잘생긴 연산홍이 환희의 폭개를 하여 온 집안에 꽃향기가 분분하다. 연산홍은 실내를 붉게 물들이고 이제사 가쁜 숨결을 고르는 듯 든든하고 화려한 자태까지 돋보인다.

진분홍과 조화를 잘 이루는 온시디움은 우선 꽃모양이 특이하여 눈길을 끈다. 노란 물이 묻어날 듯 곱디고운 색에 한 장으로 된 꽃입술 위로 꽃의 설판은 진한 와인빛을 띠었고 작은 꽃잎 두 장이 벌의 형상을 한채 붙어있다.

잎이 두껍고 넓은 호접란은 꽃이 대접 모양을 한채 큼직하여서 제일 먼저 눈에 든다. 향은 없어도 꽃잎이 핑크빛을 띠어 사랑을 느끼게 하는데 뉘를 그리 기다리나 삼,사 개월 동안이나 피고, 지고 하는 걸 보면 순정 또한 유별난 난이다.

진한 피빛의 꽃들이 대궁에 나란히 매달려 있는 금화사는 꽃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향 또한 엄마가 새댁시절 쓰시던 가루분 향과 흡사해 집안에 앉아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작년봄에 만개하여온 샤벧이 올해도 꽃을 피웠다. 허나 작년에 비하면 꽃 대궁과 꽃송이가 많이 허약해졌다. 시집온 후로 내 집 환경에 아직 적응을 못한 듯하기도 하고 세송이 꽃망울이나마 터트리는데 산고가 큰 듯하여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향 또한 달콤하여 양란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연약해 뵈는 춘란에 비하면 대궁이며 잎이 짙푸른 채 건강미까지 철철 넘치는 양란은 훤칠한 외국인을 보는듯하다. 허나 춘란이나 동양란에는 근육질의 남성을 닮은듯한 양란과는 견줄 수 없는 현숙한 여인의 덕목과 은근과 끈기가 배어있다.

그리고 외유내강한 데다 한국 여인의 정숙함까지 엿볼수 있고 사시사철 한결같은 자태는 옛여인네의 절개를 보는듯하여 소장한 이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여 준다. 또한 야생에서 자생할 수 있는 여건을 고루 갖추고 있어 전문적인 난 채취꾼 아니면 민간인의 눈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질 않는다.

양란처럼 키가 크면 꺽기거나 부러지겠지만 30센티 내외의 작은 키라 안분하기 적당하여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주고 있다. 힘있게 뻗은 잎들은 화분 밖으로 휘어져 마치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는 듯 환상적이다.

거기에 좌우로 잎이 하늘거리는 요동성까지 갖추고 있어 어지간한 바람에도 안전하여 피풍 피해를 거의 입지 않는다. 적당한 햇볕과 적당한 그늘을 좋아하여 늘 화평과 중도의 길을 지니고 있는것도 춘란의 습성이다.

여기에 적당한 차양을 즐겨 침실 머리맡이나 안방화장대 같은 곳에서도 조화를 이루어 은근한 겸손미까지도 엿볼수 있다.

춘란의 꽃은 양란에 비해 색이 화려하거나 향이 짙거나 꽃이 오래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두 개의 봉심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반려자의 격이라고나 할까. 거기에 세 개의 주판과 부판은 하늘과 땅, 사람의 뜻을 담고 있으며 그 힘은 넘쳐 내면의 깊은 세계까지 말하는 듯 하다.

아름답고 청결한 화경에 흰 준주사처럼 아른거리는 얇고 새하얀 천을 휘감고 있으므로 자리옷 차림의 여인이 낭군곁으로 다가앉는 듯 하다고나 할까. 이렇듯 봄색이 완연하지도 않은 이르디 이른 봄에 춘란 꽃이 피는 것을 보면 미성년자가 과년기를 맞지 않고 시집가는듯한 애처러움이 없지않다. 또한 춘란에는 미미한 향내밖에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르르한 자태에 향까지 겸하였다면 난꾼들에 의해 보쌈당하고 산사람들에 의해 꽃이 꺾이는 수난을 당해 고산에서나마 자생하기가 힘겹지 않겠는가.

나는 요즘 밤을 즐긴다. 식구들이 제각기 잠든 고요한 밤 막 꽃잎이 벙근 키 작은 풍난이며 춘란 가족 옆에 앉히고 무념 무상하며 번잡한 마음을 다스린다.

난분 옆에는 녹차가 제격이라지만 향긋한 한 잔 술이 더 좋아 연산홍 빛 자두주를 따른다. 자두 향이 난향에 녹아 밤이 황홀하다. 안주가 없으면 어떠랴 벗이 없으면 어떠랴. 분분한 향기 한 웅큼 타 마시니 오관이 트이는 듯 명쾌하다.

오랜동안 돌보아온 일란이 두란이 세란이를 쓰다듬어본다. 사계의 순리를 적절히 이용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성장하고 있는 이들의 고결함에 늘 고개 숙여진다. 물고 물리고, 먹고 먹히는 속된 세사의 아픔이 이들에겐 한낱 무용지물에 불과 하다는 것이 부럽기만하다.

아름다운것만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얘기만 귀담아듣지 못하고 인간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고 그리고 더 많이 용서하며 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

난분 중에 막내인 오란이가 화경을 안고 있다. 여름내내 짙푸름을 간직한 채 잎을 고르더니 겨우내 화경에 꽃망울을 잉태한 채 몸을 불리며 품위를 지켜왔다. 볼록볼록 부픈 화경을 소리없이 밀어 올리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새하얀 실루엣을 가르며 연두빛 꽃망울을 터트릴 채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의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출산하지 못하는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잉태하여 출산하고 자손을 퍼트리는 일까지 조용히 지혜롭게 자행하는 모든 식물의 덕행을 겸손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술과 난과 문향이 울어나는 밤 원광 스님의 난시 한 수를 읊조리며 마지막 잔을 들고 향내를 마신다.

석간수를 씼어도 얼룩이 남는다
옥수반을 괴어도 만리에 뜬 달이라
들릴 듯 끊일 듯
발 곱게 앉은 님
서성이며 오는 침묵이거니
이냥 동여맨들
한 가슴에 두맘 깃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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