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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서영이 / 피천득

부흐고비 2021. 3. 8. 08:52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정서가 풍부하고 두뇌가 명석하다. 값싼 센티멘탈리즘에 흐르지 않는, 지적인양 뽐내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소녀다. 버릇이 없을 때가 있지만, 나이가 좀 들면 괜찮을 것이다.

나는 남들이 술 마시느라고 없앤 시간, 바둑 두느라고 없앤 시간, 돈을 버느라고 없앤 시간, 모든 시간을 서영이와 이야기하느라고 보냈다. 아마 내가 책과 같이 지낸 시간보다도 서영이와 같이 지낸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내가 산 참된 시간이요,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은 물론, 내 생애에 가장 행복된 부분이다.

내가 해외에 있던 일 년을 빼고는 유치원서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일 서영이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왔다. 어쩌다 늦게 데리러 가는 때는 서영이는 어두운 운동장에서 혼자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은 일 년 동안이나 서영이와 떨어져 살던 기억이다. 오는 도중에 동경에서 삼 일간 체류할 예정이었으나, 견딜 수가 없어서 그날로 귀국했다. 그래서 비행장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나는 택시에 짐을 싣고 곧장 학교로 갔다.

내가 서영이 아빠로서 미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내 생김생김이 늘씬하고 멋지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젊은 아빠가 아닌 것이 미안하다. 보수적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기대가 커서 그것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 '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 무렵 서영이는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글을 읽고 공책에다 '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아빠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그는 능히 막아낼 수 있으며, 나의 마음속에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나는 '서영이도 결혼을 할 테지'하고 십 년이나 후의 일이지만 이 생각 저 생각 할 때가 있다. 딸이 결혼하는 것을 '남에게 준다', '치운다' 이런 따위의 관념은 몰인정하고 야속하고 죄스러운 일이라 믿는다. 딸의 사진을 함부로 돌린다거나 상품을 내어 보이듯이 선을 보인다거나 하는 짓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서 보내야겠는데 큰일 났어요. 어디 한 군데 천거하십시오.' 이런 소리를 나에게 하는 사람의 얼굴을 나는 뻔히 쳐다본다.

결혼을 한 뒤라도 나는 내 딸이 남의 집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집살이는 아니하고 독립한 가정을 이룰 것이며, 거기에는 부부의 똑같은 의무와 권리가 있을 것이다. 아내도 새집에 온 것이요, 남편도 새집에 온 것이다. 남편의 집인 동시에 아내의 집이요, 아내의 집인 동시에 남편의 집이다. 결혼은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사랑은 억지로 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사람에 따라, 특히 천품이 있는 여자에 있어서 자기에게 충실하기 위하여 아니하는 것도 좋다. 자기의 학문. 예술. 종교 또는 다른 사명이 결혼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의의 있을 것이다. 결혼생활이 지장을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퀴리 부인 같은 경우는 좋은 예라 하겠다. 여자의 결혼 연령은 이십 대도 좋고 삼십 대도 좋고, 그 이상 나이에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청춘이 짧다고 하지만 꽃같이 시들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이런 소원이 있었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걷고 싶다'고. 지금 나에게 이 축복 받은 겨울이 있다.

장래 결혼을 하면 서영이에게도 아이가 있을 것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렇지 않으면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좋겠다. 그리고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서 살겠다. 아이 둘이 날마다 놀러 올 것이다. 나는 <파랑새> 이야기도 하여주고 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의 엄마처럼 나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장기도 둘 것이다. 새로 나오는 잎새같이 보드라운 뺨을 만져보고 그 맑은 눈 속에서 나의 여생의 축복을 받겠다.

 

 

수필 같은 생애 … 세상 '인연'을 접다

2004년 피천득옹(左)과 전문의인 아들 수영씨가 동네 꼬마 류태우군을 안고 밝게 웃고 있다. [중앙포토] 금아(琴兒) 피천득. 그는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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