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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주변 정리 / 성은숙

부흐고비 2021. 3. 5. 12:54




소리로 듣기



베란다 창문을 열자 상큼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오월이다. 비 온 후라 모처럼 쪽빛 얼굴 내민 하늘과 앞산 싱그러운 숲이 상연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간밤에 깊은 잠을 못 이뤄 무지근한 기분을 가볍게 날려 보내는 듯 청량하다.

오늘은 꼭 만나리라. 일 년에 너더댓 번 만나 식사를 함께하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속 깊은 지인을. 지난 모임에 못 나와 궁금했던 그녀를 만날 심사로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의 메시지가 이미 떠 있었다. 이심전심인가 하여 반가웠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5호실. 고 OOO" 눈을 의심하며 보고 또 확인했다. 오늘 만나고 싶었던 바로 그녀의 남편 별세를 알리는 부고였다. 이럴 수가. 돌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다리가 풀리며 심장박동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얼마 전 그의 남편이 간단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란 소식을 들었는데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식사도 규칙적으로 하고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라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만나 헤어질 때쯤에는 오늘 저녁 반찬을 무슨 메뉴로 해야 할지, 밥 순이 신세는 언제쯤 면해 볼지, 주부 사표를 언제 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넋두리하며 빙긋이 웃던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아른거렸다.

지인들과 5호실을 찾았다. 그녀의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력서를 대신하듯 줄줄이 서 있는 조화(弔花)에 매달린 흰 리본 속 내용이 말하고 있다. 양복 차림의 노신사 문상객이 많은 걸 보니 남아있는 친구가 많다는 것이고 인간관계가 원만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혼식은 부모 손님이고 장례식은 자식들 손님이다.’란 말이 있는데 자녀들도 잘 키웠지만 고인의 최고 학력과 화려한 경력이 마지막으로 조명되는 현장이다.

그녀는 검은 상복에 슬픔을 애써 삼키고 있는 모습이 붉은 눈자위와 부은 얼굴에서 금세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위로에 “갑자기라 아쉽긴 하지만 고생 안 하고 가서 다행으로 여긴다.”라고 응수했지만 흐린 말끝에 묻어난 여운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문상을 다녀온 그 날 저녁 잠자리에 누웠지만 뒤척이느라 새벽녘에 이르렀다. 남의 일 같지 않기에 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마음을 뒤섞어 놓았다. 내 일이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아니 내가 갑자기 떠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 남편과 티격태격할 때 “나 죽으면 새장가 갈 꿈도 꾸지 마라.”고 오지랖 넓게 유치한 엄포를 쏟아놨던 기억에 피식 웃고 말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한쪽이 먼저 떠나고 나면 후회는 다 있게 마련이다. 예상을 가늠하면서도 후회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오늘도 공염불이고 하루하루가 시간에 둥둥 떠밀려가고 있다.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먼저 가느냐 좀 더 머물다 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죽음이란 단어를 터부시할 일만도 아닌 것은 모두의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교회 구역장 수련회 참여해 유언장 쓰기 프로그램에서 내가 썼던 내용이 언뜻 떠올랐다. 떠나기 전 꼭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여긴 것은 대인관계에서 맺힘이 없어야 마음이 평안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다음은 고마웠던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분명히 하는 것이고 본인 명의의 재산과 유품처리를 위한 당부의 말, 자녀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 병원 신세를 질 경우 연명치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말라는 부탁과 장례식 절차에 관한 사항까지도 미리 일러두는 내용이다. 맑은 정신과 건강이 남아있을 때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떠나는 이의 가치관과 정신적 유산까지도 전달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준비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실제 상황같이 썼다. 조별 발표 시간에 등 떠밀려 나갔다.

즉석에서 1시간여를 넘게 골몰히 생각하고 쓴 유언장을 읽어 내려가다 나 자신이 먼저 울컥 눈물이 솟구치고 목이 메는 바람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손수건을 적시고 숙연한 분위기로 변해 버렸다.

지난해 주변 정리를 한다며 상자에 쟁여 놓았던 수많은 사진을 정리해 없애 버렸다. 매달 큰 액수를 지출하며 서재에 꽂아두고 뿌듯해했던 세계대백과 사전류와 전집류도 인터넷에 밀려 도서창고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도자기 그릇이 한참 유행일 때 주부의 자존심을 세워가며 열심히 수집해 모은 것이 다 쓸모없는 구닥다리 골동품이 되었다. 손님 접대를 집에서 하지 않는 시대를 살면서 수십 년 쌓아놓고 살았다. 남의 손 빌리지 않고 내 손으로 하고 싶어서 무거운 그릇들과 책에 담긴 지난날을 회상하며 꽤 많은 양을 현관 밖으로 내놓고 보니 마음에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졌다.

아직도 손을 못 대고 있는 것은 장롱 속과 이 방 저 방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다. 추억과 사연이 담겼다고 이유를 달다 보니 쉽게 없애는 용기가 나질 않는다. 결국엔 정리 대상인데 시기가 자꾸 늦춰지고 있는 건 아직은 외출을 할 수 있어서이다. 하지만 고희(古稀)를 넘기고부터는 다른 사람이 겪는 일도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문상을 다녀오고 더욱 실감했다.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수시로 내가 벌인 일을 점검하고 양심과 자성의 소리 들으며 용서하고 화해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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