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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명함 이야기 / 배철웅

부흐고비 2021. 3. 10. 08:32

묵은 명함들을 정리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최 아무개…. 명함을 한 장씩 손에 들고 그 주인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 그들의 웃는 얼굴이 명함 위에 오버랩되어 보인다. 그러다가 내게 소중한 명함을 골라 상자에 담고 나머지는 휴지통에 버린다.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모두 계속 보관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사, 감사, 변호사, 박사, 사장, 회장…. 서울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죄다 사장님이나 회장님의 머리에 맞는다더니 세상에는 감투도 많다. 그 사장님과 회장님들이 오늘은 내 손아귀에서 놀고 있다. 내 손이 일진이 좋아 호강을 하는 셈이다.

어떤 명함들은 화려하다. 어찌나 화려한지 나 같은 사람은 명함도 못 내밀게 생겼다. 번쩍번쩍하는 금박지(金箔紙)에 찍은 것도 있다. 종이처럼 금을 얇게 펴서 글자를 검게 양각(陽刻)했는데 명함의 주인이 부자라고 하니 혹시 24K 순금(純金)은 아닐까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God(신·神)보다 Gold(금)’라고 하는 세상이지만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어떤 명함은 감투가 열 개도 넘는다. ‘무거워서 그 많은 걸 어찌 다 쓰고 다니노?’ 싶다. 향우회장, 평통 자문위원, 청소년 선도위원, 아파트 주민대표, 뿌리찾기중앙회장, 족보 간행위원장, 종친회장, 재개발 추진위원장…. 정말 ‘야! 대단하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새는 명함이 너무 흔해져서 중학생도 사진이 박힌 명함을 갖고 다닌다. 이러다가는 강아지도 명함을 갖고 다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선거 후보자도 아니면서 자기 얼굴을 넣어서 명함을 찍는 것이 대세다. 바야흐로 ‘자기 PR 시대’라서 모두 “나 예쁘지?” 자랑하는 것 같고, “언젠가는 나도 출마할 테니 내 얼굴 잊지 말아요!”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철학교수 한 사람은 자기 명함에 ‘Good-0=God’라는 아리송한 영어 글자를 새겨 놓았다. 무슨 뜻인지,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善·Good)에서 0을 빼면 신(神·God)이 된다’는 뜻인가? 그러나 0을 빼는 건 아무것도 안 빼는 것과 같으니 ‘선(善)=신(神)’이라는 뜻일까? 종교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뜻을 잘 모르지만 ‘신의 뜻을 따르면 선해진다’는 의미로 ‘God+0=Good’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God’를 거꾸로 하면 ‘Dog’가 된다는 배덕자(背德者)도 있었다지만 그런 벼락 맞을 소리는 아예 말아야 한다. 내 신앙이 소중하면 남의 신앙도 소중한 법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증오는 남의 믿음을 가볍게 여기는 몰지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명함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깨알 같은 글자로 앞뒷면에 뭔가를 빼곡히 적어놓은 것과 이름과 직위 딱 두 가지만 큼직하게 박아 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복잡한 명함과 간단한 명함의 두 종류다.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분일수록 명함에는 별로 적힌 게 없다. 큼직한 글씨로 국회의원 아무개, 경찰서장 아무개, 그 말뿐이다. ‘국회의원이나 경찰서장이라면 알아서 모실 일이지 이러쿵저러쿵 군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 같다.

반면에 그저 그렇고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명함에는 대개 구구한 내용이 많다. 이름, 호(號), 전직, 현직, 후직(後職)(?), 수상 경력, 자격, 면허, 심지어 동창회지에 발표한 글의 제목도 나열하고 집전화·휴대전화·이메일까지 적어 놓았다. ‘이 정도인데 정말 날 존경 안 할 거야?’ 그렇게 외치는 것 같다. 그렇게 시시콜콜 적으면서 왜 전 마누라, 현 마누라의 이름은 빼먹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두 가지 명함이 모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긴 마찬가지다. 큰 글자로 달랑 이름과 직위만 박아놓은 건 내로라하며 으스대는 것 같고, 초등학교 반장 경력까지 나열한 명함은 한 가지라도 더 과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딱하다. 둘 다 “나 멋있지?” 하고 자랑하려는 속내가 보이는 점에서 결국은 한 종류라는 말이 맞겠다.

언젠가 은퇴한 K교수님에게서 받은 명함은 좀 달랐다. 옅은 파란색 A4용지에 PC로 찍어 손수 가위로 오렸는지 약간 비뚤비뚤한 종이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고 이메일 주소도 적어 놨다. 아무런 장식도 꾸밈도 없는 명함이었다. 나는 그 명함을 들고 생각했다. 꽃은 예뻐지려고 안달하지 않고 내로라하지 않는다. 그저 생긴 대로 피었다가 말없이 져갈 뿐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 무심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명함으로, 얼굴로, 재주로 사람들은 제멋을 자랑하지만 그럴수록 진정한 멋은 사람에게서 멀어진다.

멋없는 멋, 그게 바로 멋이건만 너도나도 겉꾸밈에 정신을 뺏기고 있다. 사람의 얼굴이나 몸, 하는 일은 모두 너무 작위적(作爲的)인 것은 부자연스럽고, 자연 그대로 무심한 데서 진정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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