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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양지(陽地)의 꿈 / 천경자

부흐고비 2021. 3. 11. 08:41

아침나절에 눈이 살포시 내리더니 날씨가 포근하고 어느덧 하늘은 코발트 그레이로 개며 햇볕이 죄어든다.

오랫동안 난로 온기에 생명을 유지해오던 고무나무와 포인세티아 분을 햇볕이 쬐는 곳으로 옮겨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이파리가 다 져서 후리후리한 키에 빨간 꽃만 이고 있는데 바람이라도 불면 바람개비가 되어 뱅뱅 돌것만 같다.

뜰의 작은 장미 나무는 뿌리 언저리에 덮어준 노란 왕겨와 그 위에 아직 녹지 않아 희끗희끗 햇빛을 받고 흰 빛깔로 반짝거리는 눈을 이불 삼아 잠자고 있는 듯 섰어도 어딘지 봄 냄새를 풍긴다.

좁은 마당 한복판에 양자배기를 내놓고 더운 물을 붓고 거기다 가루비누를 풀어 빨래를 했다. 늘 방구석에 화분처럼 앉아서 그림만 그리거나 무슨 생각에 잠겨만 있다가 이렇게 포근한 양지 쪽에서 빨래를 주무르니 따뜻한 것이 오붓하게 가슴으로 번져오고 가슴이 상쾌하다.

보그보글하게 올라오는 하얀 거품에 손을 담그고 메리야스 셔츠를 주무르면 엷은 비누 냄새가 그 무엇이 그리운 것처럼 코에 스며온다. 그리고 하얀 러닝셔츠의 목 언저리를 일부러 코에다 대면 그 독특한 머릿기름 냄새가 엷게 올라와 그이가 지금 금방 어디에서 전화라도 걸어줄 것만 같은 착각이 잠시 마음 속을 감돌다 사라진다.

벌써 퍽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아이 아버지의 내의를 빨고 있는 나는 한없이 무엇인지 그립고 아쉬운 생각에 사로잡히면서도 손은 여전히 움직였다. 이와 같은 착각은 꼬리를 이어, 나는 꿈에 잠긴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발레의 이야기인 <백조의 호수>를 생각해 본다. 마술에 걸린 공주가 날이 새면 백조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공주를 사랑하는 왕자는 그걸 슬퍼하고...

또 <화조(火鳥)>라는 춤이었던가. 마술사 때문에 돌이 된 왕자를 구하려고 공주는 화조의 빨간 날개의 깃털 하나를 얻으려 한다. 그 춤에서 화조가 정열의 화신(化身)처럼 불구덩이가 구르듯 날개를 발발 떨며 춤추는 모습이 떠오른다.

어째서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또 나는 공주도 아니건만 아이 아버지의 지금의 처지를 위의 발레에 나오는 마술사에게 끌려간 왕자같이 생각해 보기도 한다.

금싸라기가 내린 듯이 따스한 햇볕 아래서 나는 부질없이 이런 생각에 잠겼다가 굳어지는 아픈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거기서 나는 어젯밤에 꾼 꿈을 찾아 헤매었다.

성좌(星座)의 전설을 잊었지만 태양이 없는 하늘에 백조좌의 하얀 백조가 판에 박힌 듯 그대로 하늘에 뱍혀 있는 꿈이었다. 그게 흉몽이건 길몽이건 간에 지금 바라보는 따뜻한 하늘이 아니고 차디찬 코발트 하늘에 하얀 레이스로 된 새가 날고 있는 광경은 냉혹한 지성파 화가의 그림을 몇 겹 아름답게 다듬어 놓은 그대로였다. 날개의 레이스 구멍 속에는 날개를 거둔 백조들이 한 마리씩 앉아 있는 것이 무수한 작은 별들처럼 보였다. 나는 그림 세계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 차디차고 아름다운 광경은 하늘에서 그야말로 화석화 되어버린 운명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화조의 깃털만 가지면 어떠한 소원도 이룰 수 있는 맑고 싸늘한 백조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쫑쫑이 대문을 힘차게 열고
“엄마, 어디 갔어?”
하며 나를 찾는 소리에 나는 깜빡 백일몽에서 깨어나 빨래를 다시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런대로 멀지 않아 봄이 올 것만 같다.

 

 

 

[천경자 '미인도' 위작 논란] 佛 과학 vs 韓전문가 안목 중 검찰은 뭘로 판단할까?

지난 11월 3일, JTBC TV는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다중스펙트럼 광학연구소(Lumiere Technology Multispectral Institute)’의 감정팀(이하 ‘프랑스 감정팀’)이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 주장되는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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