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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신록의 여인 / 박연구

부흐고비 2021. 3. 10. 12:59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누가 명명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동감이었다.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이 의당 계절의 여왕좌(座)를 차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래 피는 꽃도 있지만 대개는 쉬 지고 만다. 잠깐 피어있는 꽃이건만 이를 시샘하여 부는 꽃샘 바람의 추위가 건강치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좋은 달에 속한다. 내 부모가 나를 낳아 준 달도 3월이고, 내가 나의 둘째 딸을 낳은 것도 5월이기 때문에 5월을 더 좋아한다.

초춘, 초하, 초추, 초동의 네 계절 중에서도 초하가 제일 좋은 계절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록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네 번 꽃을 피운다. 첫 번째는 물어볼 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의 꽃이요, 두 번째는 잎이라는 꽃을 피우고, 세 번째는 단풍이란 꽃이고 네 번째는 겨울의 잎 없는 가지의 눈꽃(雪花)을 말함이다. 나는 이들 네 가지 꽃 중에서 신록의 꽃을 제일 좋아한다. 봄의 꽃이나 가을과 겨울의 꽃들은 곱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어쩐지 그 뒤에 가려진? 비애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우리가 신록 속에 있으면 영원히 젊음을 간직할 것 같은 안정을 얻는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우이동 골짜기에는 신록으로 뒤덮여 있었다. 작년에도 아니 재작년에도 와 본 곳이라고 싫증난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 거닐어도 좋고 친구와 거닐어도 좋지만 연인과 거닐면 더욱 좋은 곳일 뿐이다. 등산복 차림의 남녀의 얼굴엔 초록 물감이 배어들어서인지 더욱 건강한 모습들이다.

나는 고향 친구들과 야유회에 참석한 것이지만 춤추고 노래하는 덴 취미가 없어서 혼자 숲속을 거닐었다. 한 눈으로 바라보면 한결같이 푸르기만 한 숲이지만 가까이 나뭇잎 하나하나 살펴보면 나무마다 다른 모양의 잎을 보여주었다. 마치 꽃잎의 모양이 각각이듯이 색깔 역시 한결같이 초록같지만 자세히 보면? 연초록, 진초록 등 수없이 구분되는 빛깔을 지녔다.

이 맑은 물과 푸른 숲에서 하루를 즐긴다는 것도 그만큼의 행복을 소유한 셈이 된다. 여기저기엔 가족 동반의 즐겨운 정경이 눈에 띄었다.

나는 무심히 한 자리의 부부에게 눈을 주었다가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딸을 데리고 나온 부부였는데 너무나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여자는 보통 키가 넘는 미인형인데 남자는 바로 보기에도 민망스런 꼽추였다. 아무리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다. 저런 꼽추인 남자가 어떻게 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았을까 싶을 만큼 차이가 있어 보였다.

개울의 바위에 아내와 딸이 앉아 있고, 꼽추 남편은 그 불편한 몸으로 뷰렌즈로 피사체를 들여다보면서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었다. 자동 셔터를 누룬 모양인지 제 딴엔 빠른 동작으로 아내 옆에 앉는 것이었다. 카메라의 자동이 잘 안 듣는지 그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몇 번 만엔가 제대로 찍었다 싶었는지 딸을 가운데 앉힌 두 부부가 서로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부부가 되었는지 알 바가 아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부였지만? 여인의 밝은 표정으로 보아서 그녀만 전적으로 희생되는 것도 아닌 성싶었다. 만일에 본의 아닌 결혼을 한 사이라면 남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더욱이 시샘이 많은 여심이 어떻게 남들과 비교가 되는 곳에 놀이를 올 수 있으랴.

다른 데 가서 또 사진을 찍으려 함인지 그 자리를 떠났다. 부인이 앞장을 서고 뒤에 남편이 딸을 무등 태우고 따라가는데,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부인의 키와 무등 탄 아이의 키가 같은 게 어찌 우습지 않으랴만.

신록의 빛깔과 그 부인의 수박색 옷 빛깔이 한 빛깔처럼 보였다. 아니 이때처럼 여인의 옷 빛깔이 아름답게 보였을 때도 없는 것 같다.

나는 그 여인의 옷 빛깔보다도 더욱 밝고 아름다운 신록의 미를 여인의 마음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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