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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양말 / 권민경

부흐고비 2021. 3. 11. 15:22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단칸방이었다. 나에게 독립된 공간이 생길 때는, 가족들이 각자 다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뿐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 시간을 좋아했다. 남들과 어울리는 것은 나에게 부담을 주곤 했다. 그런 내가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잠들기 직전뿐이었다. 나는 나만의 공간인 이불에 들어가 상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쏘다녔다. 이불 속에서 나는 파티에 가는 아가씨가 되기도 했고 의문의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이 되기도 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시간. 그 시간의 주인은 나였다. 그렇게 나는 낮보다 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계절 중에 겨울을 제일 좋아한 것도 밤이 길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의 겨울은 추웠다.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를 뗐고, 단칸방은 천천히 달궈졌다. 어느 때엔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방바닥이 더워지지 않아 우리 네 식구는 몸이 곱은 채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런 밤에도 나는, 식구들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추위와 싸우며 상상의 장소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매우 추웠던 어느 겨울밤, 엄마는 자기 전에 나와 언니에게 양말을 신겼다. 질감이 보풀처럼 부글거리고 촉감이 거칠었으며 보라색과 갈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털양말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인데 양말을 신다니 기분이 묘했다. 따뜻하고 도톰한 양말을 신은 채 발가락을 꾸물거리자 밤마실 가는 듯 즐거웠다. 밤에 밖에 나간다는 것, 그것도 겨울밤에 외출하는 일은 어린아이로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밤에 외출 준비를 한다는 것은 내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상상이 아닌 실제로 외출이라도 준비하는 마음으로 양말을 신었다. 그리고 곧 얼마나 즐거운 일이 생길까, 기대하며 얌전히 이불에 들어갔다.

나는 두꺼운 양말을 신고, 겨울밤의 탐험가가 되어 처음 본 동굴과 바위산을 헤맸다. 튼튼한 양말 덕분에 험한 자갈밭을 걸어도 안전했고 무엇보다 발이 따뜻했다. 강을 건널 때에도 강물은 양말 속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나는 상상 속에서 평소보다 먼 곳까지 갔다. 험준한 언덕을 넘고 얼음 계곡을 건너 전에는 닿지 못했던 곳까지 갔다. 긴 밤, 오랫동안 계속되던 모험은 꿈으로 이어졌다. 꿈에서 나는 중력을 무시한 채 뛰어오르고 가라앉았다. 그런 와중에도 발은 든든하고 따뜻했다. 밤새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기운이 넘쳤다.

간밤엔 추운 곳에서 잠들었지만 아침에는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가득했다. 양말은, 새벽에 몸을 부르르 떨며 깨어나야 하는 기분 나쁜 일은 막아주었다. 코끝이 시린 겨울 아침,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밤사이 여러 곳을 헤맨 나는 안락한 지붕, 안락한 이불 아래 누워 있었다. 몸부림을 친 까닭인지 한쪽 양말은 반쯤 흘러내려 있었지만 내 발에서 완전히 벗겨지지는 않았다. 내 발은 정말 오랫동안 뛰어다닌 양 훈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상상은 언제나 나 혼자만의 것이었고, 그 세계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신겨준 겨울 양말은 나의 세계를 안전하게 받쳐주었다. 알뜰히 보호받을 것을 알았으므로 오히려 마음껏 현실이 아닌 곳을 노닐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어느 곳에 있든, 어느 곳을 떠돌든, 어린 날의 겨울 양말을 떠올리면 발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맨발에 유리 구두를 신은 아가씨는 발만은 따뜻하게, 긴 밤을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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