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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버지의 뒷모습 / 신달자

부흐고비 2021. 3. 11. 08:44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손수건 한 장을 옆에 두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생긴 나의 버릇인데 이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에도 어느 사이 손수건을 챙기게 된다. 사실 아버지에 대해선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나보다도 우선 아버지 자신이 감정에 헤프지 않고 절제 능력이 있으시니 나도 따라서 이유에 앞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상에 헤픈 나이지만 상대방이 감정을 이성적으로 다스리면 한풀 물러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 극히 우울한 마음이 되어 발걸음이 느려진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고 어느 장소건 아버지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으며 눈물부터 난다.

혈육이 무엇인데 이리 가슴이 아플 수가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며 다시 또 운다. 아버지는 올해로 86세이시다. 나는 요즘 부모님이 늙는 일은 어떤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물론 나이와 상관없이 행복한 노년도 있을 것이다. 좋은 자손들을 두다 보면 몸이 불편한 것 외에 다른 감정적 상처 안받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너무 가엾고 초라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의 외로운 노년이 물론 나의 책임이라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효도라는 게 생각만큼 되는 것이 아니다. 한때 나는 아버지를 적의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 어머니를 외롭게 하고 내 어머니를 눈물나게 한 아버지는 결국 내 어머니에게 좌절을 안게 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미움의 대상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남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아버지를 몹시 사랑하는 쪽이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시기는 아주 짧았고 아버지의 방황을 이해하고 심지어는 멋스럽게 보았던 적도 많았다. 아버지는 시인이었다. 아버지는 가수였다. 아버지는 물건을 보는 안목이 있었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특히 꽃을 사랑하셨는데 우리 집 뜰은 봄이면 장미로 가득해 사람들은 우리 집을 딸부잣집이나 장미집으로 불러주었다. 화사한 봄날 새벽 아버지는 장미가 가까운 쪽의 마루 끝에서 시조를 읊으시곤 하셨다. 새벽잠이 없던 나는 아버지의 시조 읊는 소리를 듣고 깨어 나는 때가 많았고 그때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참 멋진 아버지를 가졌다는 행복감에 젓곤 하였다.

그런 믿음 때문일까. 오랫동안 집을 비우셨다가 어머니의 날 벼락같은 통곡을 들으시며 초췌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뵐 때도 아버지는 그저 멋지시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시인이셨으므로, 아버지는 등단만 안 하셨을 뿐 이 땅의 영민한 시인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일기를 가끔 훔쳐보았는데 일기를 읽을 때마다 문학전집을 읽는 감동보다 더 큰 흥분을 느끼곤 하였다. 사람의 심리 묘사도 그랬지만 자연을 생명의 주인으로 표현하는 대목에 가서는 가슴을 치며 아버지가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신 것이 안쓰럽곤 하였다. 아버지의 가슴은 건강한 떨림으로 가득했고 자연을 느끼고 사랑하는 감각을 게을리 하지 않는 젊은 사상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주먹 하나에 힘을 주면 이 세상에 남아날 것이 없다고 생각 할 만큼 건장했던 아버지는 이제 세 살짜리의 주먹에도 쓰러질 것 같이 허약한 할아버지가 되셨다. 남보다 허리가 굽어서일까. 남보다 더 초라해 보인다. 일생을 죽자고 좋아한 사이는 물론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리워하신다. 일찍 가신 어머니를 부러워하시는 것은 남은 자식들의 큰 죄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직접 모시지 못하는 아버지의 궁핍한 생활이 뼈를 아리게 하지만 나는 그저 눈물만 흘린다. 아버지의 외로움은 지금 극도에 달해 있다. 아버지는 드디어 눈물을 보이시는 일이 잦아졌다. 작년만 해도 눈물을 삼킬 수 있는 절제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절제력마저 아버지를 떠났다. 며칠 감기를 앓으시던 아버지는 이 못난 딸의 한마디 위로에도 흐느끼신다. 그만큼 약해지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대로 나의 아버지며 멋진 나의 아버지시다. 울고 있는 딸의 손목을 잡으시고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이런 좋은 봄에 울지 마라. 이렇게 우는 시간을 다른 데 쓰거라." 아버지, 내 아버지의 지금 뒷모습은 눈물 그 이상은 아니다. 그저 한마디만 하고 싶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시인 신달자 "나의 대표작은 오늘 밤에 쓸 시"

한국의 대표 여성 시인으로 꼽히는 신달자 시인. 그녀는 지난해 12월,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했던 15편의 이야기에 64장의 사진을 더해 <신달자 감성 포토 에세이>를 펴냈다. 삶의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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