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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머니의 유산 / 이인복

부흐고비 2021. 3. 11. 13:07

머리가 반백이 되고, 남편을 사별한 친구들이 주변에 늘어나면서, 요즘 더 자주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허총이라도 아버님의 유택을 어머님 곁에 만들어 세워 두 분의 영혼을 모셔야 하겠다는 궁리에 절실해질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6.25가 나던 해,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그날 이북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인천에 몇 개의 공장을 가지고 계시던 아버지의 기업 운영 지침은 대학생들만을 종업원으로 채용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공장은 밤에만 가동하고 낮에는 쉬어야했습니다. 아버지는 검소하고 검약한 근로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본 유학을 마치신 세련된 신여성으로 화려한 의상만을 좋아하셨고 그러한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두 분이 자주 다투시는 것을 나는 늘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불굴의 끈기와 의지력을 유산으로 남겨 주신 분은 아버지뿐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요즘 내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또 내가 반백의 연륜을 산다고 의식하면서, 자주 어머니의 크신 유산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고 있다는 일종의 어머니 현존감을 시시각각으로 느낍니다.

이버지를 이북으로 끌려 보내고 가산이 영락하자, 나는 다섯 동생을 끌고 고아원에 들어갔고 거기서 우리 가족은 모두 카톨릭 신자로 영세 입교하였는데, 이 크리스천 정신이 어머니의 가치관을 완전히 변모기켜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양하는 여인이 되었고 프랜시스코 성인이나 막달라 마리아 성녀처럼, 이웃의 가난을 위로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을 수렴하고 감사하는 영성적인 참 크리스천으로 성화되어 갔습니다.

내가 고아원에서 나와 동생들을 부양하며 대학엘 다니고 드디어 졸업이 가까워 오던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천행으로 젊은 의사와 또 장래가 촉망되는 한 법학도의 구혼을 받았는데, 내 어머니는 의사도 법학도도 아닌 내 국민학교 때의 한 반 친구였던 청년을 지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홀어머니의 자식이고, 노모와 단둘이 누으면 꽉 차는 사글세방 외에 가진 것이라곤 대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한 청년을 “네 아버지가 누구이신가를 아는 사람이니 너의 성공을 위해 성원해 줄 제일 가까운 평생지기가 아니겠느냐”라고 말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만약 내 어머니께서 딸의 혼사를, 팔자 고치기 식의 수단으로 생각하셨더라면 나는 지금쯤 의사나 법관의 안방마님이 되어 만족한 삶을 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끝없는 갈등과 방황이 나 지신과 주변 사람 모두를 슬프게 했었을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교훈이나 꾸지람을 평생 들은 일이 없습니다.

전적인 신뢰를 지니고 나의 어머니는 내가 탈선의 위기 또는 죽음의 턱밑까지 접근했을 때조차도 단 한 마디의 지시나 주관 이입을 시도하지 않으시면서, 눈 딱 감으시고, 내 자유의사나 자발적 결단의 사건 처리를 기다리셨습니다. 피나는 매보다 고성의 질책보다 더 무섭고 무거운 내 어머니의 신뢰와 기다림. 내게 대한 어머니의 무서운 태도를 나는 신뢰와 기다림이라는 단어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내게 암시적 지시를 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네 아버지가 누구이신가를 아는 사람이니... 평생지기가 아니겠느냐?”면서 가난한 청년의 미래(그러나 머지 않아 학자요 교수가 됨)를 예견하시고 천거해 주셨던 그일 뿐입니다.

나의 애들 아버지는 그래서, 내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유일한 유형의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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