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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자물쇠 / 박동조

부흐고비 2021. 3. 18. 05:31

내가 사는 곳은 오래된 아파트 육층이다. 엘리베이터가 없기에 여든 개의 층계를 올라야 우리 집이 나온다. 집까지 오르면서 마주치는 열두 집 현관문이 크기와 색깔이 똑같다. 십여 년 전에는 열쇠 구멍까지 같은 모양이어서 오밤중에 남의 집 문을 쾅쾅 두드린 술 취한 남자 얘기가 심심찮게 여자들 입에 오르기도 했었다. 서로가 낯선 얼굴로 살아가는 요즘은 자물쇠가 달라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안면을 닫고 산 건 아니다. 자물쇠 모양이 똑 같았던 시절에는 이사를 가는 사람은 섭섭하다는 인사를 남겼고, 이사를 오는 사람은 떡을 돌려 안면을 텄다. 통로 사람들끼리 계모임을 만들어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가기도 했다. 시장에 갈 때는 이웃에다아기를 맡겨도 허물이 되지 않았다. 이런 얘기들은 그때 살던 사람들끼리 나누는 추억담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현관문에 달리는 전자식 자물쇠가 이웃이 바뀌는 기별이 되더니 이제는 누가 이사를 오든 가든, 몇 호에 누가 살든 관심이 사라졌다. 철저한 무관심이 규범이라도 되는 듯 아예 문을 닫아걸고 산다. 길에서나 마트에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안면에 인사라도 할라치면 딴 곳을 향하는 상대편의 눈길에 머쓱했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주는 것도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부터 음식이 남아도 옆집 벨을 누르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다.

이게 다 첨단의 자물쇠 때문이라고 하면 애먼 소리 한다고 열쇠가 펄쩍 뛸까? 하지만 디지털 자물쇠가 등장하고부터 통로 주민 사이에 왕래가 끊어졌으니 공교롭지 않은가. 통로에서 열두 집을 통틀어 우리 집만 아직까지 쇠붙이 열쇠로 문을 연다. 다른 집은 비밀번호가 열쇠다. 그제는 지문으로 문을 여는 자물쇠가 등장했다. 외양부터 세련된 그것들은 아날로그 방식에 길이든 나를 움츠리게 한다. 자물쇠가 진화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의 문이 점점 더 굳게 닫히는 걸 느낀다.

이런 식의 삶이라면 섬에서 사는 것과 뭐가 다를까. 이웃 도시 아파트에서 미라가 된 시신을 발견했다는 끔찍한 뉴스가 강 건너 불이 아닐지도 모른다. 언제 내 이웃에, 내 신상에 그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대문이 없었다. 대문이 없어도 사는 데 애로를 느끼지 못했다. 하긴 마을 전체가 한집의 가족처럼 지낸 터수에 대문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웃끼리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고 지내던 시절을 기억하는 나는 문을 꼭꼭 닫고 사는 지금이 불편하고 못마땅하다.

이중 삼중 잠금장치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무인 경비 시스템까지 동원하는 사회다. 거리 곳곳에서 폐쇄회로 텔레비전 카메라가 눈을 홉뜨고 지켜본다. 뛰는 자 위에는 나는 자가 있다고 도둑의 머리도 진화한다. 불신 역시 뒤질세라 덩치를 키운다. 그야말로 이 사회는 훔치는 자, 지키는 자, 그리고 불신하는 마음이 삼각을 이루어 진화하는 중이다.

최근에 지은 아파트 대부분이 통로 입구 현관문에 전자식 수문장을 설치했다. 수문장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을 열어 준다. 이 아파트도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아무나 무시로 통로를 오르내리지 못할 것이다.

자물쇠와 열쇠는 짝을 이루지 않으면 존재의 가치가 없다. 통로 주민이 이웃에 닫아 건 마음 문에도 열쇠를 여비해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이웃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가 무언지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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