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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디아 띄우기 / 이명진

부흐고비 2021. 3. 18. 13:06

제22회 신곡문학상 수상작

바라나시.

인도에서 가장 인도다운 곳. 그곳에는 갠지스 강이 흐른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을 흠모한다. 그들은 갠지스 강을 어머니의 강이라 부른다. 시바를 아끼고 숭배하는 만큼, 살아서나 죽어서나 갠지스 강에서 자신의 몸을 씻길 원한다. 씻는다고 하는 뜻은, 청결의 의미와 함께 정화를 바라는 그들만이 지닌 순수함의 근원일 게다. 세상에 태어나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신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가 그들은 갠지스 강이라 믿고 있다.

힌두교 순례자들은 인도 최고의 성지인 바라나시로 평생 쌓인 죄를 씻어내기 위해 모여든다. 그들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을 하게 되면 해탈을 하게 된다고 믿기에 이곳에서 죽기를 소원한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바라나시엔 80여 개 이상의 가트가 옛 특색과 실용성을 간직한 채,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땅으로부터 강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사람들은 ‘가트(Ghats)’라고 부른다. 화장터를 겸한 가트에서는 하루 종일 시체 태우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무심한 불길은 죽은 이의 영혼에게 자유를 선물하듯 흔들리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화장터 한쪽엔 세상 떠난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하루 종일 나뭇단만 나르는 이들의 피곤한 삶이 발길을 질척거리게 한다. 빨래터인 가트에서는 집안 대대로 빨래만 해야 하는 하층민의 삶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맴돌고 있다. 신의 영역인 강가에서는 물빛이 아무리 더러워도 침대보까지 하얗고, 뽀얗게 반짝이며 건조된다. 바지랑대 걸린 빨랫줄이 아니라도 괜찮다. 가트 옆 흙먼지 바닥에 하얀색 옷을 빨아 널어도 얼룩 하나 없이 보송보송 말라 버린다. 그들의 신은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인 이들에게 ‘신의 손’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듯싶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일출을 보며 희망을 품기 위해 동해로 달려간다. 반면 인도 사람들은 새해 소원을 바라나시에 있는 갠지스 강에서 디아를 띄우며 빈다. 디아는 야자수 잎을 접어 생화 꽃잎을 담아 촛불을 피울 수 있게 만든 작은 접시다. '디아 띄우기'는 접시에서 촛불이 꺼지지 않고 강물을 따라 흘러 신이 계신 영험한 곳까지 가기를 소원하는 의식이다. 일출과 함께 작은 쪽배로 강 중앙까지 나가 가트를 바라보며, 촛불을 켜서 디아를 띄워 보내는 일은 사뭇 경건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띄우는 디아를 보며 강이 오염되고 환경이 변한다고 걱정한다면, 그건 문명에 대한 이기심일 수 있다. 그들의 무조건적인 바람은 디아로 사용되는 야자수 잎도, 생화 이파리도, 촛농도, 강물에 녹아 다시 환생을 꿈꾸도록 빌어 주는 일이다. 바라나시에서 새해 첫날을 맞이하며, 덩달아 디아 띄우기에 동참했다. 같은 쪽배를 타기로 한 일행들과 백여 개의 디아를 준비했다. 새벽에 일어나 메모지에 열심히 소원도 써본다. 해마다 빌어야 할 소원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도 빌어야 할 소원이 무엇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기. 일상에서 가족들과 부딪치고, 지인들과 부대껴야 하는 일로부터 욕심도 버리자. 명예도 욕망도 내려놓는 일이 쉽지 않지만, 지친 몸과 정신은 간절히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쪼글쪼글 주름살이 잡혀가는 중년의 몸은, 엇박자가 아닌 한 박자 느리게, 쉬엄쉬엄 살아가라고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천천히 물결 따라 흘러가기 시작하는 디아를 보며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각자 희망하던 소원은 이렇게 소박한 모습으로 기뻐하는 심성에서 우러나올 터다. 사람들의 속마음도 ‘맑음’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다른 배를 타고 따라오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부러워하며 손을 흔든다.

선뜻 열 개의 디아를 그들에게 선물했다. 여행지에서의 배려는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 인연은 다시 윤회의 고리를 만들 일이다. 그래도 좋았다. 이 순간만은 신의 강물에 흠씬 젖어 들어 순수함만 남았으면 했다. 바라나시에 오면 갠지스 강에서 일출과 일몰 시간에 보트를 즐기라 한다. 더불어 디아를 띄우며 소원을 빌라 한다.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에서 솟아오르는 불꽃과 디아에 담긴 촛불의 흔들림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이 공생하는 바라나시는 여행객들에게 생각을 정지시켜 준다. 모든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여행은 재충전의 안식처가 된다.

여행객들 눈에는 더럽고 오염된 강이지만, 인도인들에게는 성스러움의 극치인 장소 아니던가. 시체를 태우고 남은 재도 갠지스 강에 버린다. 타다 남은 시체의 일부도 갠지스 강에 버린다. 오폐수도 갠지스 강에 버린다. 죽은 소와 개 등 동물의 사체도 갠지스 강에 버린다.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이 보여도 그들은 강물에 들어가 정성스럽게 목욕을 한다. 바라나시의 골목길이 미로처럼 좁고 구불거리는 이유도 물의 흐름을 배우기 위한 명상법의 한 방편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아'를 찾기 위한 사람들에게 갠지스 강의 가트는 신들이 만든 시험장은 아닐지 의문이 들었다.

자칫 좁은 골목길을 헤매다 마주치는 큰 소들은 어지러운 현대 문명을 질타하는 듯싶다. 그런 탓인지 바라나시에서는 시간을 잊는다. 날짜도 요일도 찾지 않는다. 가트에서 갠지스 강의 모래톱과 보트와 일렁거리는 물결과 장사꾼들의 흥정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모두 하나가 된다. 언젠가 우리도 화장터의 장작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인생들 아니던가. 울고, 웃으며 살다 한 줌 재로 변하는 부질없는 목숨일 터인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아등바등 동동거린다.

이제 갠지스 강이 더럽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도 쓰레기로 오염된 강으로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 든다. 구경을 하든, 구경을 당하든, 모두 일직선상에서 똑같아지는 곳이 바라나시다. 유별나게 깔끔을 떨 필요도 없다. 길거리에 너절하게 쌓인 똥 무더기가 사람의 짓이든, 소의 짓이든, 개의 짓이든, 염소의 짓이든 알 필요도 없다. 싫으면 무심히 피해가면 그뿐이다.

갠지스 강에 디아를 띄우며 소원을 비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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