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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과의 나들이는 언제나 기대만발하다. 구월 초순, 옷깃을 스치는 선들바람에 가을 냄새가 얼핏 스쳐가지만 한낮 땡볕의 기세는 녹록치 않다. 이번 코스는 동부 해안도로를 경유하며 식산봉 둘레 길도 걷는다.

같이 한 일행 거의가 고향이 제주인데도 지역마다 비경을 자랑하는 해안도로를 지날 때는 처음 본 것 마냥 눈들이 빛났다. 시냇물도 끼리끼리 모여야 졸졸졸 노래하듯이 우리끼리도 눈길 주는 곳마다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나와 자리를 같이 한 문우와는 눈짓만으로도 감성이 오고 가니 하루의 시작이 신이 난다.

식산봉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느낌이 있는 곳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섬처럼 보여서 섬 속 또 하나의 섬으로 다가온다. 오름 입구로 들어섰다. 각종 키 큰 수목들이 입구부터 울창하다. 바로 해안가에 인접해 있으니 해풍으로 황량할 거라는 나의 생각은 크게 빗나갔다. 자생하는 식물들이 하나같이 여느 오름보다 무성하게 제 몸집을 키우고 있다. 우거진 나무에서 내뿜는 상긋한 피톤치드 향이 비릿한 갯냄새를 밀어 내며 정화해 주는 성싶다.

나무 사이로 얼핏 얼핏 보이는 바다 물빛은 이곳이 아니면 못 볼 그림 같은 풍경이다. 바다 품에 안긴 나무, 그 나무를 품은 바다, 음양으로 늘 얼굴 맞대고 있어서 생기 가득한가. 풀빛과 물빛이 서로 육지와 바다를 드나들며 가을 초입의 흥을 담뿍 담아낸다. 햇살조차 녹음의 싱그러운 향에 취했는지 어질어질 거린다. 여기 나무들은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있으니 심심치도 않겠다. 오름을 둘러싼 바다도 물그림자로 드리운 나무들의 흐느적거리는 자태를 물결로 보듬어 안고 도는 나날들이 행복하겠다.

청량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걷다가 발아래를 보니 맥문동이 오달지게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계요등 덩굴들도 키 작은 소나무를 타고 오른 가지마다 오종종한 얼굴들이 앙증맞다. 천남성 열매 덩어리는 한나라의 왕비를 시해한 독기를 자랑이나 하듯이 한 주먹 불끈 쥔 모습이어서 가던 발길 움츠리게 했지만 그 독도 긴요한 약이 되는 진리가 있거늘, 자연이 행하는 이치를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리랴.

얼마 걷지 않았는데 어느새 정상에 다다랐다. 표고 육십여 미터의 아담한 오름 너머, 눈 아래 펼쳐지는 마을 오조리(吾照里), 나를 비춰보는 마을이란 뜻이 신비롭다.

언제였더라. 십여 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작가가 되어 내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게 소원이던 시절, 기성 문인과 같이 오조리에서 열리는 1박 2일 문학세미나에 우연찮게 참석했었다. 행사장인 오조리 광장 길 건너는 호수 같은 바다였다.

오조리가 고향인 시인님이 인사말을 하며 오조리 지명을 설명하는 순간, 나는 홀린 듯 길 건너 해안가에 자리 틀고 앉아버렸다. 그날 밤, 은빛 바다에 취하며 하늘로 눈길 돌리니 윤슬에 내려와 있던 빛, 빛들. 그 밤, 오조리 해안가에서 달과 별과 같이 나를 비춰보았던 시간은 황홀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를 면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행운의 날이기도 하다.

그 이후, 오늘 찾은 오조리 해안은 낮이나 밤이나 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임을 다시금 보여 준다. 육지와 바다가 그림인 듯 오밀조밀하게 들어차 있는 50여만 평 규모의 만(灣)이라 하니 우포의 늪 못지않게 규모가 커 보인다. 이곳은 태풍이 몰아쳐도 물결이 그다지 요동치지 않는단다.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이다. 복 받은 농어촌마을이다. 오조리 해변, 모래밭에서 조개잡이 하는 이들의 모습도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풍경이다.

식산봉을 내려와 서쪽으로 돌아 나가는 길 왼쪽은 물밑에 해초랑 조가비 조각들이 훤히 보인다. 물 깊이가 종아리 밑이라 어디 눈먼 문어라도 기어 나와 흐느적거린다면 뛰어 들어가 첨벙거리고 싶다. 길 오른쪽엔 제주기념물 47호로 지정된 황근이 귀한 몸값만큼이나 의젓하다. 꽃은 져버려 아쉬웠지만 후대를 기약할 열매를 실하게 달고 있어 기특하고 반갑다.

어디서든 단체 생활에는 불협화음이 있기 마련이다. 일행들이 제각각 흩어져 버렸고 점심시간이 임박해서 식산봉 들어섰던 길로 빨리 되돌아 나오라는 전갈이 다급하다. 아기자기한 둘레길을 포기하고 버스 있는 곳으로 나온 것이 못내 서운하지만 어차피 여행길도 왔던 길 되돌아가야 함이려니. 우리 인생길처럼.

나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 간절한 날, 아쉽게 되돌아섰던 길 나서듯 서둘러 또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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