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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손 / 계용묵

부흐고비 2021. 3. 24. 08:54

종이에 손을 베었다.

보던 책을 접어서 책꽂이 위에 던진다는 게 책꽂이 뒤로 넘어가는 것 같아 넘어가기 전에 그것을 붙잡으려 저도 모르게 냅다 나가던 손이 그만 책꽂이 위에 널려져 있던 원고지 조각의 가장자리에 힘껏 부딪쳐 스치었던 모양이다. 선뜩하기에 보니 장손가락의 둘째 마디 위에 새빨간 피가 비죽이 스미어 나온다. 알알하고 아프다. 마음과 같이 아프다.

차라리 칼에 베였던들, 그리고 상처가 좀 더 크게 났던들, 마음조차야 이렇게 피를 보는 듯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칼 장난을 좋아해서 가끔 손을 벤다. 내가 살아오는 30년 가까운 동안에 칼로 손을 베어 보기 무릇 수백 회는 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그때그때마다 그 상처에의 아픔을 느끼었을 뿐, 마음에 동요를 받아본 적은 없다.

그렇던 것이, 칼로도 아니고 종이에 손을 베인 이제, 그리고 그 상처가 겨우 피를 내어 모를 만큼 그렇게 미미한 상처에 지나지 않는 것이언만 오히려 마음은 아프다. 종이에 손을 베다니! 종이보다도 약한 손, 그 손이 내 손임을 깨달을 때, 내 마음은 처량하게 슬펐다.

내 일찍이 내 손으로 밥을 벌어먹어 보지 못했다. 선조가 물려준 논밭이 나를 키워주기 때문에 내 손은 늘 놀고 있어도 족했다. 다만 내 손이 필요했던 것은 펜을 잡기 위한 데 있었을 뿐이다. 실로 나는 이제껏 내 손이 펜을 잡을 줄 알아 내 마음의 사자(使者)가 되어 주는 데만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펜이 바른 손의 장손가락 끝마디의 외인 모에 작은 팥알만한 멍을 만들어 놓은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글 같은 글 한 줄 이미 써 놓은 것은 없어도, 그것을 쓰기 위한 것이 만들어 준 멍이라서 그 멍을 나는 내 생명이 담긴 재산과 같이 귀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불안과 우울까지도 잊게 하는 내 마음의 위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멍 한 점만을 가질 수 있는 그 손은 인제 확실히 불안과 우울을 가져다 준다. 내 손으로 정복해야 할 그 원고지에 도리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네가 그 멍의 자랑만으로 능히 살아갈 수가 있을까 하는 그 무슨 힘찬 훈계와도 같았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손은 불쏘시개의 장작 한 개피도 못 팬다. 서울로 이사를 온 후부터는 불쏘시개의 장작 같은 것은 내 손으로 패어져야 할 사세(事勢)인데, 한번 그것을 시험하다가 도끼 자루에 손이 부르터 본 이후부터는 영 마음이 없다. 그것이 부르터서 튀어지고 그렇게 자꾸 단련이 되어서, 펜의 단련에 멍이 장손가락에 들 듯 손 전체에 굳은살이 쫙 퍼질 때에야 위안이던 불안은 다시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련만, 그 장손가락의 멍을 기르는 동안에 그러할 능력을 이미 빼앗기었으니 전체의 멍을 길러 보긴 이젠 장히 힘들 일일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그 손가락의 멍에 불안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내 생명이기는 하다. 그것에 애착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때, 나라는 존재의 생명은 없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자처하고도 싶다.

하지만 원고지를 정복할 만한 그러한 손을 못 가지고 그 원고지 위에다 생명을 수놓아 보겠다는 데는 원고지가 웃을 노릇 같아, 손을 베인 후부터는 그게 잊히지 아니하고 원고지를 대하기가 두려워진다. 도끼 자루에 손이 부르터 본 후부터는 그것을 잡기가 두려워지듯이, 그렇게….

 



계용묵桂鎔默(1904~1961)

소설가.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

어려서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東洋)대학 동양학과를 다녔다.

25년 조선문단지에 <상환>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

<백치아다다> <바람은 그냥 불고> <물매미>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단편집으로는 <병풍에 그린 닭> <별을 헨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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