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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믿을 만한 사람 / 김소경

부흐고비 2021. 3. 24. 23:02

밤늦은 시간에 초인종이 울려서 누군가 했더니, 보일러를 보러왔다는 귀에 익은 목소리다. 서둘러 대문으로 나가는데 섣달 찬바람에 몸이 움츠러든다.

어쩐 일로 이런 시간에 오느냐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일이 밀려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며칠 전에 보일러실에서 안 나던 소리가 난다고 연락을 했더니 그 일로 온 것이다.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 보일러를 점검하고, 별 이상이 없다면서도 다시 찬찬히 살핀다. 기온이 내려갈 때 생길 수 있는 현상도 일러 주고, 동파에 대비할 점도 확인시켜 준다. 일이 그렇게 많으냐고 했더니, 한파로 집집마다 손을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잠이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동네에서 설비가게를 하고 있는 중년의 이 사람은 늘 웃는 얼굴이다. 우리집에 이런 저런 일을 봐 준지도 십 년이 넘고 있는데, 공사 중에도 내가 열쇠를 맡기고 외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처음 이웃에서 소개 받았을 때 이 사람의 어떤 점이 동네에서 그토록 신용을 얻고 있을까 궁금했다. 한 번 일을 맡겨 본 후에는 공사비를 묻지 않고 일을 맡긴다는 것이다. 전에 어떤 설비공에게 하수도 공사를 맡겼다가 날림으로 골탕을 먹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선뜻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이런 내 하소연을 들은 어떤 이는 일 하는 사람 곁을 지켜야 한다면서 요즘 세상에 누굴 믿느냐고 했다. 서글픈 얘기지만 도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일도 잘 하고, 공사비를 묻지 않아도 되는 설비공이 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긴데, 말만 들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막상 일을 맡기려고 했을 때 식구들은 다른 설비공에게서도 견적을 받아보자는 의견이었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도 아니고 해서 그것도 일리가 있겠다 싶어 그렇게 해보았다. 공사비가 적지 않게 나왔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열흘간 예정으로 그 사람이 우리집 보일러 공사를 맡게 되었다. 나는 틈틈이 그 사람의 일 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우수가 지났지만 삼월의 날씨는 쌀쌀했다. 봄 날씨는 아니라면서 차를 내다 주었더니 사양조로 고맙다고 한다. 찻잔을 받아 든 그는, 바람이 차다면서 나보고 어서 들어가라고 한다. 버티고 있을 수도 없고 해서 들어 와 있는데, 한참 후에 나와 보라고 한다. 고장 난 곳을 찾았다면서 자세히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 것으로 갈아 놓은 것을 또 보여 준다. 이렇게 확인을 시킨 다음에 흙을 덮는 것이 일의 순서였다. 알아서 하면 될 일을 왜 하나같이 내게 알려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다음에 이상이 생기면 찾아내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일이 끝나면 주변 정리를 말끔하게 해 놓고, 연장도 흙을 털어서 가지런히 정리를 해 둔다. 다음날 또 할 일을 뭘 저렇게까지 할까 싶을 정도다. 그러고는 무슨 재미난 놀이를 하고 난 사람처럼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간다. 생계를 위한 직업일 터인데, 천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 그의 태도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열흘을 잡았던 공사가 하루 더 하고 끝이 났다. 품을 파는 사람이라 공사비를 더 주어야 하나 했는데 몇 만원 덜 받겠다고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자재가 덜 들었다는 얘기다. 자로 재서 파는 비단도 아니고, 땅 속에 묻힌 자재를 내가 어찌 알 것인가. 나는 몇 만원보다도 그 사람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대문 앞까지 비질을 해 놓고 돌아갔다.

저녁때 식구들이 그 사람에 관해서 물었다. 어떤 점이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얻어서 서로 소개를 해 주느냐는 것인데 나는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 사람은 별나게 칭찬 받을 일을 한 것이 없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남의 일을 제 집 일처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처세(복福을 부르는 일이)가 사람에 따라 쉽다면 쉽고, 어렵다고 하면 한없이 어려운 일이다.

섣달 밤늦은 시간에 보일러를 봐주러 온 그 사람은, 또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면서 바쁘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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