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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약을 팔지 않는 약사 / 김소경

부흐고비 2021. 3. 24. 22:06

중학교 국어교과서 1-2에 수록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약국 하나가 있다. 몇 년 사이에 주인이 세 번쯤 바뀌었는데, 이번에 간판을 건 사람은 꽤 오래 하고 있다. 어쩐 일인지 먼저와는 달리, 약국 안 의자에는 동네 사람들이 늘 모여 앉아 있곤 한다. 지나다 보면,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수더분한 인상의 여주인이 안노인들과 환담하는 모습이 보인다. 약국 규모도 점차 늘어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 처음 약국 간판을 낸 사람은 중년의 여약사였다. 혼자 산다는 그녀는 느지막하게 약국 문을 열고 저녁엔 일찍 닫곤 했다. 입고 있는 가운은 솔기가 너저분해 보였다. 가끔 들러보면 약장 안은 제대로 정돈되어 있지 않아서 어수선했다. 지나는 말로 이사갈 생각이냐고 하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어수선하던 약국은 문을 닫았다.

오래 가지 않아 새로운 이름을 걸고 약국문이 다시 열렸다. 주인은 대학을 갓 졸업한 듯싶은 자매였다. 약국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그들은 흰 가운을 단정하게 입었으며 안에는 종일 고전 음악이 흘렀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약국 문은 다시 내려졌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선뜻 발을 들여놓기에 주춤거려지는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닫혀진 약국의 간판 한 쪽이 처진 채 한 계절이 지났다. 어느 봄날, 약국 간판이 반듯하게 다시 걸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안으로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것 같았다. 약국 안의 긴 의자는 비어 있는 날이 없었다.

그 약국 여주인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날은 시내에서부터 두통이 와, 집으로 오는 길에 그 약국에 들렀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에게 두통약을 달라고 했더니, 좀 쉬면 괜찮을 거라면서 찬 보리차를 꺼내 한 컵 따라준다. 그러면서 되도록이면 약은 먹지 말라고 한다. 생각지 않은 그 처방에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위 속에서 한 줄기 소나기를 만난 듯 심신이 상쾌한 느낌이었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그녀와 허물없는 이웃이 되었다.

약국 앞을 지날 때마다 유리문 안으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약만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궂은 일 기쁜 일들을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문 상담역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웃의 일을 내 일인 듯 마음을 열고 들어주는 것이다.

약을 팔려고 애쓰지 않는 약사, 그녀는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병을 낫게 한다. 그래서 그 약국은 날로 번창하는 것 같다.


 

김소경 수필가는 194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칠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춘천여자중학교, 성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결혼으로 중퇴하였다. 1986년 「월간문학」(수필)으로 등단하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기획위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역임, 제15회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과나무 곁에서'  '행복이란 이름의 나무'  '약을 팔지 않는 약사'  '꽃말찾기'  '잃어버린 사랑' 외 

중학교 국어교과서 1-2에 「약을 팔지 않는 약사」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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