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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겨울 바다 / 견일영

부흐고비 2021. 3. 25. 12:49

칼바람이 찬 바닷물과 어울려 춤을 춘다. 그들에게도 무슨 울분이 있는가. 그것을 참느라 짙푸른 색깔을 하고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낸다. 바다의 안색은 사납다 못해 검푸르고, 쉼 없이 불어대는 바람 끝은 고추보다 맵다. 나는 이런 기회에 잊고 싶은 사연들을 겨울 바닷속에 집어넣어 꽁꽁 냉동시켜 보려하지만 바다는 그것을 마구 토해 버린다.

세월에 밀려 떠내려간 과거, 서러운 사연도 많았고 힘겨운 일들도 많았다. 좋은 일보다 싫었던 일들이 더 많아 그것이 통한으로 남는다. 내 속을 갉아먹은 흔적들을 이 바닷물 속에 가라앉히려고 애를 써 보지만 바다는 그것을 쉽게 수용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나는 지혜로워서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우둔함을 떨쳐 버리려고 멀리 여기를 찾아온 것이다. 물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 그러나 겨울 바다는 무게가 있고 그 깊은 심해에 나를 끌어들이는 인력이 있다.

나는 종일 바다만 바라보며 모진 바람과 파도와 울부짖는 갈매기 떼를 인질로 삼아 과거를 잊으려 애써본다. 바다가 내가 되고 내가 바다가 되는 명상 속에 빠지며 끝없이 바다를 주시한다.

지금까지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나 다 가지려고 얼마나 욕심을 부렸던가. 욕도 얻어먹고 자책도 하며 가져가지도 못할 몽돌들을 마구 주워 담아 허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버리려고 여기까지 와서 못 버려 애를 태우고 있다. 모든 것이 지나고 보면 허탈하고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것들인데 그때는 눈이 멀어 돈도 가지고 싶었고, 명예도 가지고 싶었고, 사랑도 가지고 싶어 했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평생을 고행을 해도 그 경지에 도달해 보지 못하여 번뇌 속에 생을 마감하는 수도자가 얼마나 많았는데.

기껏 7막으로 끝나는 연극에서 긴 창을 들고 바보처럼 서 있는 병졸 1의 역할로 지겨운 세월을 보냈는데 6막이 끝나자 그래도 그 역할이 무지개처럼 그리움으로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나머지 1막이 지금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던 6막보다 더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병졸 1이 쓰러지거나 퇴장하는 역할밖에 없는데 그게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다니. 저 겨울 바닷속에 묻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한 조각 생애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그리움이 사랑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밀려와 가슴을 때리면 밀려온 파도 자락에 이슬이 묻는다.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면 나는 비둘기처럼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심해에 가라앉고 만다.

전생에 나는 바다에서 살았던가. 괴로우면 그를 찾고 그에게 하소연하고 때로는 그에게 푹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은 것을 보면. 겨울 바다는 겁이 없다. 거칠 것이 없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망망대해와 거친 바람만을 함께한 그 바다가 무엇을 믿고 저렇게 큰소리로 포효하는가.

나는 아예 장밋빛 인생을 희귀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소망으로 예쁜 들국화 한 송이로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세파는 이 꿈을 허무하게 무너뜨리고 황야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소망을 되찾으려는 작은 아이가 되어 이 추운 바다 앞에서 변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차다. 바다는 함께 괴로워해 주기를 거부하고 얼음 같은 바람으로 나를 밀어낸다. 멀리 외항선이 어디로 가는지 수평선을 따라 천천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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