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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버지 / 김소경

부흐고비 2021. 3. 25. 08:53

나는 결혼식장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지 못했다. 병석에 계시던 아버지는, 이승을 뜨실 것을 예감이라도 하신 듯, 서둘러 딸의 혼사 날을 정해 놓고 이승을 떠나셨다. 내 결혼식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이십여 년을 넘게 그 분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을, 나는 복되게 여기고 있다. 아버지에게 반주상 한 번 올리지 못했지만, 생전에 사윗감을 보고 이승을 뜨신 것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이들이 외조부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는 것은 늘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아버지는 다섯 살이던 나를 업고 삼팔선을 넘은 실향민이다. 곧 돌아갈 줄 알았던 그 길은 해가 갈수록 먼 길이 되었고, 술잔을 앞에 두고 고향을 그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쟁을 겪은 뒤 아버지는 강원도에 자리를 잡으셨고,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 건물도 변변치 않았고, 땔감도 넉넉지 않았다. 겨울 동안 교실에 있는 난로의 땔감은 아버지가 준비를 하셨는데, 눈 내리는 교정으로 지게꾼을 앞세우고 오시던 모습은, 한 장의 그리운 사진으로 내게 남아 있다.

실향의 아픔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의 교육열은 남달랐다. 허름하긴 했으나, 산촌에 책방이 문을 열자, 아버지는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읽게 해 주신 그 분의 배려가,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양식의 뿌리가 되지 않았나 싶다. 독서 습관을 익혀 준 것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값진 유산이었다.

유년 시절, 식구들은 강으로 나가 솥을 걸어놓고 며칠씩 지내기도 하였다. 고기를 잡기도 하고 원두막에도 올라갔다. 별이 많은 밤, 아버지는 떠나 온 고향집 얘기에, 할아버지의 모습을 들려주셨다. 조부모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나, 그 분들의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달리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두 분이 불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이 자랐다. 서울을 다녀오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옷감을 사온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밤새 바느질을 해서 이튿날에 곱게 입으셨다. 외출할 때만 몸단장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단정한 매무새로 아침 준비를 하시곤 하였는데, 그것은 그 분의 성품이기도 하겠으나, 아버지의 지극하신 애정이, 어머니를 그렇게 살도록 한 것으로 안다. 산촌에 살면서,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유년 시절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지혜의 샘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부터 도시로 내보냈다. 방학이 되어 집에 가려면, 전날 밤부터 잠을 설치곤 하였다. 머리맡 가방에는 동생들에게 줄 선물이 담겨 있었고, 틈틈이 짠 아버지의 털장갑도 들어 있었다. 그 장갑 한 짝을 어디서 잃어버리시고, 몹시 서운해 하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 형제가 여럿이니 학비도 수월치 않았으련만, 그때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학비를 더 달라고 떼를 쓰던 일 등 철없는 짓만 하다가 아버지와 헤어지고 말았다. 상장을 자주 받아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린 외에 효도라곤 한 것이 없다.

지명(知命)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이승을 뜬 아버지는, 성품이 온화하고 정이 많은 분이셨다. 그때 아버지의 어떤 대인 관계로,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얻은 일이 있었다.

여름방학 때였다. 제재소를 하던 우리 집에는 그 날도 일찍부터 나무꾼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나무를 팔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흥정을 마치고 돌아갔는데, 한 사람만 남아서 나무값을 더 쳐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그만하면 되었노라 하고,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한참 만에 아버지는 얼마인가 더 얹어주면서, 무엇이라고 몇 마디 하시는 것 같았다. 그제야 그는 허리를 굽히며 황망히 물러갔다. 알고 보니 그가 가지고 온 나무 중에는, 강가에 쌓아 놓은 우리 집 통나무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해 4.19가 일어났다. 서울에서 여고를 다니던 나는 그 데모 대열에 공포를 느꼈다. 어려서 겪은 전쟁의 기억으로 더 불안했다. 그때 혜화동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순조롭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 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팔을 끄는 이가 있었다. 그는 우리 집 통나무를 제 것인 양 팔러왔던 나무꾼이었다. 선입관과는 달리, 그는 나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세월이 가면서 그 일은 내게 삶의 지침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자식을 기르면서 나는, 아버지의 그 인품을 닮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흙 한줌씩 뿌려 주던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인품을 말해 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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