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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꿈꾸는 감나무 / 김소경

부흐고비 2021. 3. 25. 08:55

남편이 퇴근길에 스티로폼 상자 하나를 들고 와서 내게 안겨주었다. 포장으로 봐서는 내 선물 같지 않다 했더니 해삼 내장이었다. 얼음이 담긴 상자 안에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내장이 적잖이 들어 있었다. 이런 걸 어떻게 먹느냐고 했더니, 남편은 비아그라와 같은 효능을 지닌 것이라면서 두 팔을 들고 뽀빠이 흉내를 냈다. 어이없어 하는 내게, 누가 귀한 것이라고 주길래 받아왔다는 것이었다.

별것을 다 주고 받는다고 하면서 다음날 일러준 대로 참기름을 조금 넣어 식탁에 내놓았다. 어서 들고 뽀빠이처럼 근육을 만들어 보라는 데도 남편은 바라보기만 할 뿐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러더니 무슨 선심을 쓰듯 같이 먹자고 했다. 하룻밤 사이에 검은머리가 나온다면 모를까, 나는 빌어도 안 먹을 거라며 다시 접시를 남편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런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그 귀하다는 것은 모두 냉동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남편은 우리 집 아침 밥상이 최고라고 했다. 섭생이 보약이라 생각하고 차리는 제철 음식일 뿐인데, 아마도 그 내장에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갑년을 넘긴 나이에는 평상시 대로 먹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남편을 배웅했다.

대문을 닫고 돌아서서 보니 뜰에 있는 유실수들이 의연하게 보였다. 수형이 좋은 모과나무는 집안 어른처럼 거실 앞에 서 있고, 감나무는 어느 집 가장처럼 넓은 품을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여름에 유난히 비가 많이 온 탓인지 올해는 유실수의 열매가 예년 같지 않다.

이십여 년을 함께 살아온 감나무는 이제 말없이 마음을 나룰 수 있는 우정의 나무쯤 된다. 해마다 가을이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감나무다. 그런 감나무를 위해 나는 식탁에서 나오는 음식물을 나무 둘레에 묻어 준다. 생선뼈나 녹차 잎을 모으고, 동네 한약방에도 거름이 될 것을 부탁한다. 그런 내 심중을 아는 듯 감나무는 해가 갈수록 가지가 휘도록 감이 달린다. 그런데 일조량이 부족해서 수확은 줄었지만, 해거리도 안 하던 감나무가 한 해쯤 안식년을 맞은 것 같아 편안해 보였다.

아침 일을 끝내고 해삼 내장에 관해 알아보려고 일식집으로 전화를 했다. 주인의 말은 뚝배기에다 갓 지은 밥에 계란과 함께 넣어 먹는다고 하였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특유의 냄새로 먹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생선 값을 웃도는 가격이라고 한다. 묻지 않았는데도 정력제라고 일러주었다.

수화기를 놓고 나서 뚝배기를 준비해야 할지 좀 망설여졌다. 전해지는 말만 믿고 약초도 아닌 내장을 거의 날것으로 먹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해삼 내장으로 무슨 효험을 보겠다는 것도 좀 그렇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증명이 되었길레 이것이 귀한 것으로 대접을 받는가 싶기도 했다. 내장 한 조각을 꺼내들고 찬찬히 보아도 그 효력이란 게 도통 믿기질 않았다.

정력에 좋다고 이걸 들고 온 남편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의 나이가 짚어진다. 몇 해 전 갑년을 넘긴 남편은 한 살이라도 줄이고 싶은지 나이를 꼭 만으로 셈을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일어설 때면 무의식중에 “아이구”소리를 낸다. 습관이 되겠다 싶어서 그런 소리를 낼 때마다 벌금을 내기로 했더니, “아이구”하다가 “해피” 하면서 웃어넘긴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소리도 나이를 알려주는 자연음이고, 불로초를 구한 사람이 없다는 걸 모를 남편이 아니다. 그래도 뭐가 정력에 좋다는 소리가 들리면 솔깃해한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로서 내가 내린 판정은 아직은 양호한 편이다. “아이구” 소리는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술자리에 있지 말라는 경고음이었다.

몇 해 전 문인들과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낙타 젖을 마셔 본 적이 있다. 우유인 줄 알았는데 지독한 신맛이 독일에서 마셔본 버터우유 맛이었다. 물어보았더니 이것이 또 남성을 위한 귀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신맛에 컵을 내려놓는 어떤 분에게 귀띔을 해 주었더니 단숨에 한 컵을 마시고 또 마신다. 잠시 후에 그쪽을 보았더니 낙타 젖 앞에 아는 분들이 줄을 서 있다. 줄을 잘 서서 덕을 본 분들이라 할까.

낙타 젖 정도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 온 귀한 것은 무슨 일을 벌일 효험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아내인 내 입장에서는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세상만사가 지나쳐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 아닌가.

언젠가 비아그라를 가짜와 진짜를 속여서 먹이고 효능을 알아보았더니, 가짜를 진품으로 알고 먹은 쪽이 우세하더라는 보도가 있었다. 인간이 지혜를 다 짜서 만든 비아그라를 먹고 나타난 결과 중 하나다.

우리 내외는 올해로 결혼 삼십칠 년이 된다. 이만큼 살아온 터에 별나게 귀한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잘 살아온 부부가 아닐 것이다. 결혼생활에서 하루를 잘 산다는 것은 노후를 위한 애정의 적금, 서로에게 자연산 비아그라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도(道)를 닦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느닷없이 잊었던 물건을 찾는 표정으로 해삼내장의 안부를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믿기지 않는지 누굴 주었느냐고 한다. 나는 좀 뜸을 들이다가 감나무에다가 묻어 주었다고 했다.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남편이 “우리 집 감나무 난리 났네.” 하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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