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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빨래를 널며 / 배순아

부흐고비 2021. 3. 26. 16:29

꽤 늦은 시간이다.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세탁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깊은 밤을 두드린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빨랫줄에 하루 내내 마른 북어처럼 널려있던 옷들을 하나씩 걷어 찹찹하게 갰다.

잠시 후, 탈수가 끝난 빨래들을 바구니에 담아 베란다로 갔다. 그리고 빈 빨랫줄에다 빨래들을 하나 둘 걸쳐 널었다. 내 피곤도 툴툴 털어 널었다. 얌전한 큰 딸 양말, 늘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개구쟁이 아들의 헤진 양말, 앙증맞은 막내의 양말, 피곤으로 찌든 남편의 긴 양말, 그 옆에 양말목이 쭉 늘어진 내 양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널렸어도 빨래에는 열심히 살아온 가족들의 하루가 고스란히 엿보인다. 양말 곁에 또 크고 작은 빨래들을 널었다.

빨랫줄에 빨래들을 펼쳐 널 때마다 가지런히 널렸던 다른 옷들이 덩달아 출렁이며 그네를 탄다. 흔들리는 빨래를 보니 가족이란 빨랫줄의 빨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연과 혈연으로 꼬여진 빨랫줄에, 부부라는 혹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자매라는 운명적인 관계의 이름들로 제각각 걸려있다.

빨랫줄에 하나가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리듯, 한 울타리 속에서 하나가 아프면 가족 전체가 아파하는……, 빨래들이 창문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떨어지지 않도록 집게로 하나하나 집어 둔다. 내 애정들의 살갗을 감쌌던 껍데기들이 서로 다정스럽게 어울려 속살거리는 것 같다. 언제까지나 이 빨랫줄에 내 가족들의 빨래가 널릴 수 있기를, 빨래들을 매만지며 기도한다. 바쁘게 산다는 것은 뭔가 꽉 찬 듯한 느낌이 든다.

바쁘게 사느라 매일 밤 빨래를 한다 해도 내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만큼 행복한 때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들에게 엄마의 수고가 전적으로 필요할 때가 있고 때론 간섭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어린 자식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모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 도움이란 무언가를 무한정 넘치게 주는 것이 아니고, 말없이 곁에 있어 주기만 하여도 든든함을 느끼게 하는 힘이 아닐까. 몇 년 후에는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 내 품에서 떠나 갈 아이들을 생각하면, 바쁠 때가 좋은 때라는 어른들의 말을 떠올린다.

지금처럼, 내게 딸린 것들이 많은 적은 없었다. 나는 그 동안 홀어머니 밑에서, 양념 딸로 외롭게 살아왔기에 늘 한켠이 비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시어머니와 남편, 세 아이들을 보살펴야하고, 직장에 나가서는 많은 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늘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요즈음 중학생이 된 딸의 늦은 귀가를 위해 종종 밤거리로 나서곤 한다. 오고가는 불빛 속에서 서성이던 모정(母情)은 어느덧 내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사십의 나이가 그처럼 어색스럽게 다가서던 날이 엊그제 같더니, 이젠 두려움과 망설임도 떨치고 어둔 밤거리에 선뜻 나설 수 있는 중년의 용기에 익숙해지고 있다. 어머니는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세상의 어머니가 다 그렇듯이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머니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 인류의 맥이 면면(綿綿)히 이어져 왔고, 그 변함없는 모성이 언제까지 이 땅을 영원히 지켜 내리라 생각한다. 내 어머니를 닮은 나를, 훗날 또 내 딸이 닮아갈 것이다. 나와 어깨를 겨를만큼 훌쩍 커버린 내 딸을 생각하면 그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온다. 빨래를 다 널고 거실로 들어섰다. 고즈넉하다.

아이들 방을 들여다보니 세 아이들이 모두 잠들었다. 나를 향해 덩굴처럼 뻗던 손들이 서로의 몸을 휘감고 서로의 다리들이 뒤엉킨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나도 나의 하루에서 놓여나는 기분이다. 젊음은 늘 시간 부족이고, 나이 들면 시간이 넘친다. 애 키울 때는 애 키우며, 바쁘게 살라고 신은 젊음과 건강을 주셨나 보다.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싶다.

이제 내 머리채를 감아쥐던 긴장의 핀을 뽑고, 사지에 탱탱하게 감겨 오르던 풀뿌리 같은 힘줄을 느슨히 풀어놓고, 편히 누워서 나를 세탁할 시간이다. 날마다 하루를 벗고, 하루를 입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 온 일상 속에 나는 밤이 되면 하루 동안 더러워진 내 영혼을 세탁하고 싶어진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얼마나 많이 때 묻고, 구겨지고, 낡아져만 가는지.

나이가 드니, 가리고 걸쳐야 할 것들이 더 많다. 거짓으로 치장했던 위선의 옷을 벗고, 곁눈질로 부풀어진 욕심의 거품을 걷어내고, 세상의 돌부리에 넘어지고 찢겨진 마음 자락 기워, 맑고 순수한 은혜의 강가에서 말갛게 헹궈내어 날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태어나고 싶다.

물기 젖은 빨래처럼 후줄근하게 늘어진 육신의 피곤과 배배 꼬인 마음들을 털어 널고 하루를 접는다. 그리고 내일, 새로운 아침이 오면 고슬 하게 마른 하루를 꺼내어 펴 들고 새로운 내일을 다시 시작하련다.

 

 

[나의 신춘문예 도전기] ⑤배순아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나는 전주에서 태어났고, 전북대 간호대학을 나와 전남 고흥군 녹동에 있는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결혼하면서 병원에 사직서를 내고 보건교사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www.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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