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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린 손자 / 서병호

부흐고비 2021. 3. 26. 16:38

삼 년 전에 손자가 태어났다. 그동안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이 집안에는 아들이 없어 큰일이라고 걱정들을 했다. 말로는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떤가라고 해보지만 그래도 맏상주가 없으면 어딘가 서운할 것 같다. 남자 선호사상이 사라진 지 꽤 오래됐지만 지금도 남자의 쓸모가 있기 때문인가. 남아 탄생은 가문의 영광은 아니더라도 가문의 경사임에 틀림없다.

이 남자아이가 할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보는 사람마다 말을 뗀다. 발가락도 닮는다는데 얼굴형이 닮는 것은 흔한 일이다. 격세유전이론도 있으니까, 아기는 아버지를 뛰어넘고 할아버지를 닮을 수도 있다. 나를 닮은 것은 잘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대를 이을 장손이기에 의견이 분분하다

아기 엄마가 당분간 해외 생활을 해야 될 사정으로 아기를 우리가 맡게 되었다. 아기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번갈아 가면서 보고, 같이 놀아주어야 했다. 손주는 아직 말을 잘 못한다. 말문이 터지지 않아 의사표시를 잘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말을 배우는 것, 기저귀를 사용하지 않는 것, 영양이 고루 포함된 밥을 먹는 것, 잠투정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기를 양육한다는 것을 이렇게 규정한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용변 의사 표시 외에는 말을 하지는 못해도 말을 알아듣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할머니가 저녁 식사가 준비됐으니 할아버지에게 식사하러 오시라고 말하라고 하면 달려와 식탁 쪽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유모차를 타고 싶으면 바깥으로 나가자는 몸짓을 한다. “바깥으로 나갈까?”라고 물으면 “예~~.”라고 크게 또렷하게 답한다. 자기 마음에 들 때 표출하는 긍정적 반응이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고함을 크게 지르는 것은 부정적 반응이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혼선이 있을 수 없다. 아동발달심리학에서는 나이가 10세가 되면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가치판단이 확립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속담에도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어린애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손자를 통해 절감하게 된다. 이제 그 말썽꾸러기 손자도 며칠 후면 우리 집을 떠난다. 섭섭하기보다는 시원하다는 표현이 맞다.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서 변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를 검사하는 일까지 맡아 하루 한두 번을 겪어야 했다. 손자의 변에서 냄새를 못 느끼며 변의 상태를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진정 손자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언제쯤 손주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될 것인가. 그래도 기저귀 앞뒤를 알아 불편하지 않게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옛날 말에 ‘똥이 촌수를 따진다.’더니, 손주와 나는 몇 촌인가.

육아 교육에 필수적인 것이 TV 프로다. 아기를 달랠 때 우리가 주는 쿠키 과자처럼 달콤하고 맛이 있다. 미국 ‘디즈니 주니어’, 영국 BBC의 ‘텔레토비’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어린이 프로들은 애기들을 TV 앞으로 다가오게 한다.

80대 할아버지는 도저히 이해 못 하고 재미없어 하는 프로에 애들은 빠져들어간다. 어쩌다 채널을 돌릴 경우 TV 화면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울분을 못 참는다.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 푸른 잔디밭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인형 캐릭터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 부르는 원색 화면에 애들이 빠져들기 마련이다. 아동심리학의 이론을 원용한 영상물임에 틀림없다. 광고 기획 전문가들이 미래의 소비자인 어린이를 상대로 한 광고물을 기획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면도기 광고판이 어린이 놀이터에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린이집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애들의 교육장이며 보금자리이다. 부모들이 취업하고 있는 동안 애들을 정부가 육아시킨다는 제도이다. 우리 집 애기는 정부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떠났다.

할아버지의 오늘날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부터 이어온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린이 교육이 중요하다고 새삼 느낀다.

“지호야, 잘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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