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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산복도로 계단 / 양일섶

부흐고비 2021. 3. 29. 08:58

제5회 금샘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부산의 대표적인 산복도로는 초량에 있다. 초량草粱은 '풀밭의 길목'이란 뜻이고 6·25전쟁 당시에도 산기슭에 목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부산에 피란민들이 몰려오면서 풀밭은 집터로 바뀌었고 산복도로와 계단이 만들어졌다. 우리 가족이 부산에 이사 와서 처음 살던 곳은 초량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까지 살면서 정이 많이 들었던 곳이다.

얼마 전, '초량 이바구길'이 방문객들의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었다. 호기심에 지하철을 타고 초량에 있는 목적지를 찾아갔다. 길 가장자리에 설치된 관광안내도를 보았다. 안내판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거렸다. 이바구길은 낯선 길이 아닌 내가 10년 가까이 오르내리던 산복도로와 우리가 살던 동네가 포함되어 있었다. 20년 넘게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는 반가운 마음과 함께 옛날에 살던 집이 그대로 있을까하는 궁금증도 더해졌다.

나의 머릿속에는 이바구길보다 산복도로를 오르내리던 기억으로 가득 채워졌다. 초량의 산복도로는 시내버스가 다니는 윗길과 차 두 대가 겨우 비껴갈 수 있는 아랫길이 있다. 우리 가족은 '48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산복도로 아랫길의 나들목에 살았다. 그곳에서 산복도로 윗길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경사 45°, 길이 40m의 아찔한 '168계단'을 이용하면 된다. 산복도로 윗길에서 두 계단을 이용하여 달리면 부산역까지 금세 도달할 수 있다.

계단은 사람과 공간을 이어주는 층층대다. 회사나 학교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법당이나 예배당에서 기도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계단을 이용해야만 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밟고 올라가야만 목표가 보인다. 사람들은 현실에 순응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계단을 오르내린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우리 집으로 가기 위해 산복도로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아이들이 잠깐 다녔던 초량초등학교 담벼락을 지나면 48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철재 난간을 잡았다. 젊은 시절, 직장 동료들과 술을 한 잔 마신 후 버스를 타고 부산역 앞에서 내렸다. 완만하게 경사진 도로를 따라 10여 분을 급하게 올라오면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는 게 부담스러웠다. 난간을 잡고 3분 정도 쉬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반성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철재 난간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지만 '내일은 더 잘하자.'라는 다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나침반이었다.

추억의 계단을 올랐다. 내가 살던 2층집이 보인다. 집은 좀 낡았지만 파란 대문에 연분홍색 담장이 그대로다. 2층에 살면서 아랫동네와 바다를 내려다보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불편함도 많았다. 애들이 뛰어다닌다는 이유로 1층 주인집의 잔소리도 제법 들었다. 겨울에는 외풍이 심해 기침을 자주 했고 연탄재를 버리는 것도 큰일이었다. 춥고 힘들었지만 애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움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장까지 그만둔 아내가 머슴애 둘 키우면서 이래저래 고생을 많이 했다는 생각을 떠올리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산복도로 정상으로 향하는 막바지 고비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까마득한 '168계단'이다. 최근에 설치된 모노레일을 타고 편안하게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 편리는 산복도로의 진정한 의미를 반감시킨다. 힘들면 계단에 앉아 부산역과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쉬면 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갔다.

계단이 없는 산복도로는 없다. 계단을 오르면서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는 샛길을 따라 각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비록 집은 허름하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다. 앞집의 옥상은 뒷집의 빨래와 생선을 말리는 곳이고, 뒷집은 앞집의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산복도로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더 높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를 꿈꾼다. 그 계단의 끝에는 사랑과 행복의 열매가 달려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루를 보낸다.

1960∼70년대 사람들은 삶을 위해 산복도로 계단을 올랐다. 여자들은 계단 아래의 우물에서 길은 물을 머리에 이고, 막노동을 하는 가장은 온종일 일하고 받은 일당으로 식량을 구입해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기 위해, 우체부 아저씨는 희로애락이 담긴 전보와 편지를 전하기 위해, 초량초등학교의 어떤 학생은 100점 받은 기쁨을 할매 할배에게 자랑하기 위해 168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애들과 함께 산복도로 최상단에 있는 구봉산의 약수터까지 가기 위해 168계단을 몇 번 이용한 적이 있다. 계단 중간 중간에 중년이나 노인들이 부산역과 바다를 보면서 앉아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때는 그들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계단 높은 곳에 앉아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부산항에서 일감이 있다는 신호로 뱃고동이 울리면 그들은 단걸음에 뛰어 내려갔다. 기차가 검은 연기를 푹푹 토하면서 부산역으로 들어오면 서울로 돈벌이 간 지아비나 아들이 돌아오지나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눈이 빠지게 바라보는 곳이었다. 언젠가 저 아랫동네에 내려가 살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꿈을 꾸던 곳이기도 하다. 산복도로 사람들에게 계단은 가족 간의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였고 간절한 희망을 바라보는 전망대였다.

정상에 오르면 '까꼬막(산비탈)'이라는 전망 좋은 찻집이 자리 잡고 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힘들게 올라온 계단과 부산역, 바다를 바라본다. 세월이 흐르면서 산복도로 동네에도 많은 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기차는 더 빨라졌고, 바다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제 부산역의 기차를 바라보는 사람도, 뱃고동 소리에 뛰어 내려갈 사람도 없지만 '산복도로 계단'은 사람들의 작은 소망을 하늘로 올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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