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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쏟아질라….”
할머니는 내가 읽던 책을 펼친 채 방바닥에 엎어둔 걸 보면 살그머니 그것을 접으며 나무랐다. 나무람 끝에 으레 “책천(冊賤)이면 부천(父賤)이라던디.”라고 혼잣말을 했고 무슨 받침 거리를 찾아 책을 올려놓는 손길이 공손했다. 일자무식, 평생 흙을 주무르던 그분은 낚시바늘 모양으로 구부린 꼬챙이를 벽 귀퉁이에 걸어두고 글자가 찍힌 종이쪽을 보는 쪽쪽 거기 끼워 간직했다.
요즘 들어 자주 할머니가 생각난다. 엎어진 책에서 단박 학덕 쏟아짐을 끌어온 그 즉물적인 은유, 책을 천대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천대함이라 굳게 신앙하던 수더분한 언저리가 그립다.
필진이 도통 눈에 안 차지만 편자(編者)와 얽힌 인연이나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월간지의 정기구독료를 낸다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잡지가 배달되는 즉시 봉도 안 떼고 쓰레기통에 던진다는 말을 조금치의 가책 없이 했다. 보잘것없는 글 실력으로 툭하면 단행본을 찍어 돌린다며 “낯 두꺼운 사람!”이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여행기에 이르면 한층 입이 험해지는 이들 앞에서 얼뜨기가 된 적이 더 많다. 그들은 먼저, TV로 비디오테이프로 인터넷으로 거기에 전문 서적까지 얼마나 정확하고 친절하냐고 종주먹 댔고, 그럼에도 아직 여행안내서 수준급의 싱겁디싱거운 제 여행기를 읽어내라 짓찧어 맡기는 사람이 안쓰럽지 않느냐고 내게 동의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행기는 곧 돈 자랑이다’ 대뜸 등치(等値) 시켜버리는 단칼질에 비하면 숨 쉴 만했으니까.
머리가 화끈,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나는 필시 그의 눈에 안 차는 글을 끼적거렸을 것이고 그 실력으로 단행본을 찍어 돌렸으며 여행에서 돌아오면 마치 채무라도 진 듯 기록을 남기려 몸달아했으니 어찌 그들의 칼 겨냥을 비키겠는가.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역시 양심 가책이었다. 나는 저들 칼잡이와 한통속으로 장단 맞추고 덩달아 춤춘 적이 있었다. 만만한 곳에 인정머리 없이 칼을 꽂기도 했고 저자의 서명이 든 책자를 밀어둔 채 잊어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희떠운 소리를 툭툭 흘리면서도 본인은 결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남의 글 트집 잡을 주제도 못 된다고 내숭 떨었다. 얼굴에 이목구비가 있어 가능하듯이 최소한 기본구조를 갖춘 글이라면 안 읽은 적 없다고 생색냈다. 참을성 없는 내가 이쯤 품을 넓혔는데도 눈에 들지 못한 글은 좀 무례한 대우를 받아도 좋다는 말끝에 웃음을 달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그 끔찍한 무례, 경거망동을 참회하게 된 건 내 책을 찍어내고 나서다. 정확히는 ‘…시원찮은 책 한 권 만드는 데에 저 푸른 숲속의 아름드리나무 몇 그루나 베어내어야 하는지…’라는 어느 책의 경구가 얼음송곳이 되어 내 등을 찍었을 때였다. 섬뜩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끝끝내 낑낑거렸다.
“…저는 아니겠지요.”
“…저는 아니겠지요.”
당신이 팔아 넘겨지리라는 예수의 예언에 열두 제가 중 유다가 맨 먼저 설친다. 제 발이 저려서 시치미 뗀답시고 속내를 들어낸 유다는 기실 얼마나 순진한가. 나는 순진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책을 건네며 입에 발린 소리로 “부끄러운 글입니다….”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콧대를 세웠다. 색다르지 않은 여행기를 받으면 투정할 가치도 없다. 가볍게 제껴버렸고 봉도 안 뗀 책들이 쓰레기로 버려진다 해도 남의 일이거니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오, 남들도 이렇게 차츰 돌이 되어 가는 걸까.
책과 아버지의 이미지가 절대였던 할머니에게 나의 망동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할머니는 봉도 안 뗀 책들이 쓰레기로 버려진다면 이제 세상의 맨 끝 날이 왔다고 가슴 떨며 겨우 말하리라. “책천(冊賤)이면 부천(父賤)이라는디.” 그분의 전율이 나를 통째로 흔든다. 눈물처럼 말간 것이 속에 괸다. ‘푸른 숲을 떠올리면 저도 가슴이 캥겨요. 할머니. 그렇지만 저는 확신해요. 자기 글을 읽히겠다는 욕심 말고 지순한 마음을 나누려는 원(願)이 담긴 글이라면 연이어 읽히리라는 걸. 그런 책은 어버이만큼 높이 올려짐으로 결코 알맹이를 쏟아버리지 않으리라고 저는 신앙할 참이에요. 할머니.’
책이 천대받고 글이 쏟아지기 전, 매우 안온한 때를 골라 타계한 할머니가 고맙다.
이난호 수필가
△충남 당진 출생
△《계간수필》 등단
△황의순문학상 수상
△수필집: 『분홍양말』, 『윤예선 그 사람』, 『카미노 데 산티아고』, 『현대수필 100인선』
아홉 번 떠났다, 산티아고 - 이난호 기행 수필집 |
이난호 지음 | 북인 | 2016년 07월 15일 출간
목차
Prologue 그 길이 ‘거기 있으므로’ 나는 갔다·
Part Ⅰ 2014년 프란세스 루트
10년 전의 그 길 위에 다시 서다
Part Ⅱ 2013년 세지레이 루트
개가 짓지 않는 마을
Part Ⅲ 2013년 코스타 루트
카미노의 본바닥다웠다
Part Ⅳ 2013년 스피리주얼 살네스 루트
‘사람 낚는 어부’들의 마을
Part Ⅴ 2012년 포르투갈 동부 순례 루트
내가 놓친 미덕의 시간들
Part Ⅵ 2011년 리스본 루트
카미노는 힘이 세다
Part Ⅶ 2008년 오비에도 루트
씻김굿에서 포옹까지
Part Ⅷ 부록
기억에 남는 것들
이난호 수필가는 왜 산티아고 순례를 아홉 번씩이나 떠나야 했을까?
칠순 중반을 넘긴 나이에 젊은 사람도 힘들게 느낀다는 산티아고 순례를 아홉 번이나 다녀온 이난호 수필가가 『아홉 번 떠났다, 산티아고』를 펴냈다. 산티아고 순례 관련 두 번째 기행 수필집인 『아홉 번 떠났다, 산티아고』는 2008년 오비에도 루트부터 2014년 프란세스 루트까지 다섯 해에 걸쳐 산티아고의 여러 루트 중 다른 카미노들이 잘 가지 않는 일곱 개의 루트를 선정하여 순례하였다.
이난호 수필가는 산티아고 카미노(순례)를 ‘먼지 알갱이처럼 작아진 자신에게 단순해지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길이라 정의한다. “내가 별종이 아니라 그 길의 생리가 그렇다. 그 길은 침묵으로 ‘작은 별’에 닿고 싶은 이들의 시공, ‘은자(隱者)’의 사막, 대낮의 ‘어둔 밤’일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이다. 일순 스치는 아무리 짧고 희미한 미소라도 참견일 수 있다는 눈치만 채도 이미 순례다. 내가 한갓진 곳에 카미노의 출발점을 찍었던 이유, 정 넘치는 우리네 길손들을 투명인간시 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고 고백한다. 또 “나는 이렇듯 본디 덜렁이에 셈속 어둡다. 얼마나 아둔했으면 아홉 번째 등짐을 꾸리면서야 어렴풋 가늠했을까. 짐꾸리기나 인생살이나 글쓰기나 단순하다 못해 앙상해야 한다는 매뉴얼”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우쳤다고 밝힌다.
“예약하고 안심하고 떠나는 건 카미노가 아니야! 헤매고 되돌이치고 허방에 빠지기 위해 떠나는 게 카미노야!”라고 외친 이난호 수필가는 첫 카미노 때(2005년) 걸었던 ‘성 야곱의 길’을 10년 만에 다시 따라가보자며 2014년 순례 때는 더 호기를 부렸다고 한다. 휴대폰도 놓고, 무승차 종주, 허술한 침낭, 공영 알베르게 고수, 덜 자고 덜 먹기, 많이 웃기를 목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례 33일 동안 지킨 것은 고작 무승차 종주뿐이었다 한다. 그것 하나를 지켜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저자는 “이 또한 추(醜)요 욕(慾)이겠다. 많이 부끄럽다. ‘성 야곱의 길’과 나는 어떤 외생적 조건 너머에서 이미 하나였다. 그 길은 때로 나를 먼지 한 알갱이만큼 졸여 태질쳤고 무작정 단순해져라, 단순해져라, 윽박질렀지만 나는 비교적 고분고분했다. 이제 어디에도 내 할머니의 품은 존재하지 않으니, 잔뜩 후지른 입성으로 뛰어들어 실컷 몽니부리고 눈 뜨면 개운했던 맑은 하늘, 그것이 거기 외엔 없었기 때문”이라는 자기 성찰의 글을 써내려 갔다.
『아홉 번 떠났다, 산티아고』의 구성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2014년부터 2008년까지의 다섯 차례의 기행을 역순으로 실었다. 첫 카미노 때 걸었던 ‘카미노 데 산티아고 프란세스 루트(PartⅠ)’를 10년 만에 다시 찾은 2014년의 종주 이야기를 맨 앞에 수록했다. 2013년에는 한 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세지레이 루트(PartⅡ)와 코스타 루트(PartⅢ) 그리고 스피리주얼 살네스 루트(PartⅣ) 등 세 곳을 답사한 이야기를 실었다. 2012년에는 포르투갈 동부 순례 루트(PartⅤ), 2011년에는 리스본 루트(PartⅥ)를 담았고, 2008년 오비에도 루트(PartⅦ) 때는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 동행했던 좌충우돌 순례기를 남겼다. 부록 ‘기억에 오래 남은 것’들에서는 여행 중 인상 깊었던 것을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달았다.
이난호 수필가는 이번 기행 수필집의 특징을 “비교적 덜 알려진 2012년의 ‘포르투갈 동부 순례 루트’와 2013년의 반 폐쇄 지역 ‘세지레이 순례 루트’의 기록엔 기행문 속성을 따랐으나 여타에선 의도적으로 수필 쪽에 기울었으니 읽는 맛은 좀 있을까, 길라잡이 구실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5년부터 12년 동안 아홉 번씩이나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70평생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순례길 중간에서 만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카미노들, 그리고 현지인들과 부딪치며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를 수필가의 입장에서 생생하고 맛깔스럽게 담아낸 것이 다른 여행서와의 차이점이다. (출처: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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