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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월드 이발소 / 이재훈

부흐고비 2021. 4. 8. 08:35

우리 동네 입구에는 허름한 이발소가 하나 있다. 출입문 위에는 <월드 이발소>란 조그만 함석 간판이 삐딱하다. 처음 나도 그 ‘월드’란 단어가 거슬렸다. 한옥을 개조한 이발소의 규모나 외양에 비해 너무 과장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페인트는 언제 칠했는지 곳곳이 녹물자국으로 얼룩져 있고 문짝은 아귀가 안 맞아 쥐가 드나들 것 같다.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이발소 표시등만이 이발하러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부터 이곳에서 이발을 한다. 처음 왔을 때 생각이 난다. 문을 열자 나를 맞은 건 싸구려 향수 냄새와 비누 냄새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지린내 같은 세월의 냄새가 그 밑에 숨어 있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희뿌연 거울 위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액자였다. 밀레의 만종과 어미돼지가 열두 마리나 되는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간 이발소의 그림을 그대로 떼어다 붙여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사했다. 그밖에도 구공탄 무쇠 난로와 그 위에서 김을 뿜어내고 있던 누런 알루미늄 주전자 옆구리는 말라붙은 면도 비누 거품 자국이 뚜렷했다.

옛날에 본 이발소의 소품들과 너무 닮아 있었다. 이발소가 개업한 지 사십 년이 되었다는 말이 실감이 갔다. 그동안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듯싶었다. 땟국물이 밴 가운을 입은 무뚝뚝한 표정의 육십 사나이. 그가 이발사다. 그는 말 대신 얼굴표정으로 손님을 의자로 안내한다. 그는 손님이 밀려도 서두르는 법 없이 자기 페이스를 지킨다.

전기이발기보다 가위로 깎기를 고집했다. 전기이발기가 빠르고 편하긴 해도 스타일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속도뿐만 아니라 헤어스타일 까지도 자기 판단에 따라 손을 놀릴 뿐, 좀 치켜 깎아 달라든가, 아니면 살짝 손만 봐 달라고 주문해야 소용이 없다. 간혹 인민군 장교 머리 모양으로 깎아 놓고도 그는 당당하다. 그러면서 우긴다.

“이발은 예술입니다”

면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밴 가죽 혁대에 칼을 쓱쓱 문질러 댄다. 그런 다음 한 눈을 가늘게 뜨고 칼날을 응시하거나 자기 머리카락에 살짝 대어보곤 한다. 수염을 밀 때는 얼마나 철저한지 수염의 뿌리까지 후벼대는 것 같다. 좀 살살 해 달라고 해 봐야 묵묵부답. 그의 방식대로 할 뿐이다. 머리를 감길 때라고 해서 그의 철학과 신념이 바뀌란 법은 없다. 내 머리를 세면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처박고는 머리를 감긴다. 겨울에는 채 덥혀지지 않은 차가운 물을, 여름에는 더운물을 솰솰 부어대기 일쑤다. 찬지 더운지 묻지 않는다. 그리고는 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빡빡 긁어댄다. 굵고 뭉툭한 손가락이 농부의 거친 손 같다. 고개가 아파서 좀 들라치면 영락없이 찍어 누른다. 물고문이 따로 없다. 그때마다 가까운 곳에 이발소가 생기면 다시는 안 오리라 다짐하곤 했건만 어느새 나는 그의 단골손님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에 큰길 건너편에 헤어숍이 생겼다. 내가 바라던 그런 곳이다. 신세대 감각이 물씬 난다. 깔끔한 아크릴 간판에는 <미랑컬 헤어숍>이라 쓰여 있고, 그 밑에 머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웃고 있는 미인. 머리카락이 바이올린 선율처럼 멋지게 휘날리고 있다. 게다가 현관엘이디 조명이 대낮처럼 환하다. 문을 열면 나를 맞아 주는 건 상큼한 사과향기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아가씨다. 그곳에는 이발소 그림 같은 건 없다. 커다란 거울 위에 멋진 배우의 사진들이 가득 걸려있다. 내가 빈 의자에 앉으면 허리에 이발 기구를 꽂은 벨트를 찬 아가씨가 웃으며 다가와 나긋나긋한 손길로 내 머리를 만지면서 묻곤 한다.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인사를 건네는 폼부터가 월드이발소 주인과는 다르고, 강약과 완급을 달리해 가면서 가위질하는 소리도 감미로운 음악에 가깝다. 머리를 감을 때도 그렇다 물고문을 하듯 하는 일은 없다.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하고 물이 차지 않느냐, 뜨겁지 않느냐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느냐고 묻는다.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체취와 그 상냥한 말씨, 머리를 감다가 어쩌다 눈을 뜨면 아가씨의 웃고 있는 예쁜 눈과 마주친다. 천국이 따로 없다. 머리를 감고 나면 드라이어로 말려 주면서 말한다.

“머리 모양이 참 잘 생기셨어요.”

“적당히 센 머리칼이 중후해 보여서 좋아요.”

그때마다 내가 꽤 멋진 남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이 헤어숍을 두고 그 이발소에 갈 때가 있다. 술을 마시고 귀가 하는 날이거나, 까닭 없이 우울할 때 그렇다. 그리고 그 무뚝뚝한 이발사의 손에 내 머리를 맡긴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도시에 살다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이발소의 나무판대기 위에 앉아 있었을 때가 그리워진다. 이발이 끝나고 나면 밤송이 같은 내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 그 이발소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내는 건지 모른다. 낡고 빛바랜 것들이 주는 편안함. 추억은 그런 것들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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