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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간병인 자격증을 따서 어르신들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을 만났다.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요즘 돌봐드리는 어르신에 대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니, 내가 아는 어르신 같았다. 치매가 살짝 와서 방금 말씀드린 것도 기억을 잘 못하신다는 것이다. 어머, 어쩜 이런 일이…!

몇 해 전, 시니어 센터에서 어르신들께 컴퓨터를 가르쳤었다. 가르치는 것이 전직이었던 탓에 별 어려움 없이 약 3년 반이라는 기간을 봉사했다. 무슨 복인지 어르신들께서도 자기들 보다 어린 선생인 나를 참으로 좋아해 주셔서, 작은 선물을 조용히 가져다주시거나, 수업이 없는 날을 택해 같이 밥을 먹자, 차를 마시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시곤 하였다. 거의가 할머님들이었고, 또 노년의 외로움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시간이 허락하면, 같이 만나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그분들의 이민의 역사를 들어 드리곤 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매우 좋아하셨던 할머님이 있었다. 콜로라도 주, 덴버에 사시다가 버지니아에 온 지 얼마 안 돼 친구가 없으신지, 유독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많이 하셨고, 집안 행사가 있을 때도 나를 초대해 주셨다. 그런 덕분에 나는 그 할머님의 개인사에 대해 자연스레 많이 알게 되었다. 젊어서부터 열혈 여성으로, 사업으로 경제적 부를 쌓고, 남들은 생각도 못하던 1960년 대 말에 자녀들의 조기 유학을 감행하고자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오신 이야기, 미국에 와 호텔 식당에서 일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유명 인사의 한국식 식사를 해드린 것을 계기로 지위가 높아져서 좋았던 이야기, 그 후 개인 비지니스를 해 돈은 엄청 벌었는데 영감님은 딴 눈을 팔아서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등, 나를 친구 삼아 때로는 딸 삼아 자신의 일생을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영감님과 덴버에서 사시다가 주체할 수 없는 영감님의 바람기에 질려서 몰래 작은 가방을 싸서 딸들이 있는 이곳 버지니아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정도로 그 험난하고 고단한 삶을 재미있고 스릴 넘치게 이야기 해주셨던 분. 바로 그분이 지금은 그 모든 기억과 추억들을 다 내려놓고, 남은 생을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생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는 순간이었다. 꽉꽉 채우려고 아등바등 살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씩 잊어가는 것, 그래서 차츰차츰 잃어가는 것. 사랑했던 사람들을, 시간을, 돈을, 지위를, 그리고 가지려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을……

다시금 나를 돌아본다. 나도 이제는 인생의 사계절 중, 가을의 후반에 와 있다. 추수해서 혼자만 가지려 하지 말고, 좀 더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래서 잊기 전에, 잃기 전에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어야겠다. 그 때가 왔을 때, 새털처럼 날아오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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