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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파오산 / 이재훈

부흐고비 2021. 4. 8. 08:39

어젯밤에 천사가 왔나보다. 여느 때와는 달리 밖이 환해서 늦잠을 잤나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겨울의 끝자락이지만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눈길이 가는 곳에 수 없이 보이는 흰 지붕들이 고향에서 많이 봤던 산과 비슷하다. 그리움이 가슴을 헤집고 파고든다. 갑자기 산에 가고 싶다. 그래, 파오산에 가자. 이런 때에 산을 오르면 제 맛이 난다.

옷을 두툼하게 입고 소리가 나지 않게 현관문을 살짝 열고 나갔다. 찬바람이 휙 하고 얼굴을 스치니 정신이 버쩍 난다. 승강기를 타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다. 아파트의 출입문을 열고나오는데 길 위에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눈 위에 발자국이 아직 하나도 없다. 첫 발을 내디디자 신발 밑에 눌리는 눈이 아픈지 신음을 한다. 너만 아픈 게 아니고 나도 가슴이 그리움으로 가득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눈만 내려다보면서 공원을 지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마음마저 하얗게 맑아진 듯했다. 새 눈 위에 걷는 것이 힘이 들었지만 기분이 좋다. 신발에 붙은 눈을 털고 신문을 집어 들고 계단을 다시 올라오는 것으로 등산을 마쳤다.

파오산은 내가 만든 산이다. 파리는 센 강을 끼고 평지에 이루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산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하다못해 낮은 언덕도 없다. 그저 나지막한 아파트만 끝없이 널려져 있다. 개선문 근처에 지은 지가 200년이 넘는 그런 아파트에 사는데 서울을 떠나 이곳에 온 지도 일 년이 넘고 보니 고향도 그립고, 고향 산도 그립다. 어느 날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마음으로 만든 산이다. 파리에 있는 오층 아파트의 산. 파리에서 ‘파’를 따오고 오층에서 ‘오’를 꺼내서 파리에 오층 산이라 정했다. 약자로 파오산. 멀리 인도에나 있을 법한 산 이름이다.

아파트에서 운동을 할 수 없어서 파오산을 하루에도 수도 없이 오르내린다. 파오산은 오르는 게 먼저가 아니고 내려가는 게 먼저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정확하게 일곱 발걸음을 가면 계단이 나온다. 내려 갈 때에는 계단이 시계 방향으로 틀어져 있고 오른 쪽에 난간이 있어 오르내리는데 도움을 준다. 승강기를 에워싸고 도는 나선형의 계단이다. 한 층이 끝나고 세 번을 돌아야 아파트 입구가 나온다. 어떤 때는 너무 빨리 오르거나 내려가면 머리가 어지럽다. 층 사이의 공간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시작한다.

스스로 만든 산을 대견스러워하지만, 나무도 돌도 새나 벌레도 없는 건물 안에 들어 있는 계단이다. 게다가 높이가 정확하게 13.5미터밖에 안 된다. 아파트 입구에서 내가 사는 5층까지 계단이 모두 90개다. 일층에서 이층까지만 계단이 24이고 나머지 위로는 22개씩이다. 계단 하나의 높이가 15cm이다. 5층 위로 층이 둘이 더 있지만 가보질 않아서 잘 모른다. 흙이나 돌로 만든 길이 아니고 나무 계단 위에 양탄자까지 깔아 놓은 얌전한 길이다. 이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다칠 걱정도 없어서 좋다.

이제 파오산은 내 몸처럼 잘 안다. 눈을 감고 다닐 만큼 됐다. 서울에서 대사관에 근무하던 5년 동안 한 주도 빼 놓지 않고 일요일에는 산에서 살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냥 산이 좋아서였다. 산에 오르내리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흔히 말하는 건강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정신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남들이 산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산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분신과도 같을 만큼 가까이서 보냈다. 고집과 욕심으로 하고 싶던 일을 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래서 산에 오르고 싶을 때면 아무 때나 문을 열고 나와 파오산에 간다. 서울에서처럼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고도 금방 산자락에 닿을 수가 있어서 좋다. 아주 편리하다. 등산 장비나 간식도 필요하지 않다. 마음 내키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산이다. 그냥 하루에도 몇 번을 오르내린다. 한 가지 흠은 단 숨에 오르내리니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났다고 생각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르내린다. 나에게 주어진 작은 공간. 홀로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기에.

매일 아침에 신문을 가지러 갈 때 파오산을 내려오면 일 층에는 아파트로 둘러싸인 공간에 조그마한 뜰이 있어 가볍게 몸을 풀 수 있다.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바퀴를 돌려면 45 걸음이나 된다. 새마을운동체조를 흉내 내서 내 마음대로 운동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승강기를 이용하지 않고 출퇴근도 이 산을 이용한다.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화가 나거나 손자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싫증이 나면 문을 열고 나온다. 소화가 잘 되질 않거나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있어도 파오산에 간다. 모든 일을 이 산에 맡기고 산다.

그러다가 보니 자주 오르내리고 지루할 때도 있지만 운동 삼아 마음을 굳게 먹고 계단을 이용한다. 아니 더불어 안고 산다. 어떤 때는 퇴근길에 피곤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승강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물론 힘이 들지만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끝까지 아니 현관까지 간다. 그게 내가 해야 할 하루의 운동량이며 삶의 바탕이다. 이렇게 자주 오르다가 보니 일주일 동안 오르내린 거리를 계산해보면 서울에서 주말에 북한산을 다니던 만큼이나 된다. 스스로 만족하고 즐긴다.

언젠가 기억에는 없지만 나는 90살까지는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파오산의 계단의 수도 90개다. 일층에서 4층까지 계단이 68개인데 내 나이와 같다. 그렇다면 남은 22계단은 내게 남은 햇수인가. 4층에서부터 마지막 22계단을 하나씩 세면서 오르는 동안 남은 삶을 계단에 나이를 붙여 생각해 본다. 정말로 내가 90살까지 살 수 있을는지 고민을 해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68계단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쉽게 오르다가 69계단부터는 갑자기 힘이 들고 골이 아프다. 삶의 계단이라서 그런지 덜컥 겁이 난다.

이제는 어려서 자주 다니던 뒷동산의 오솔길만큼이나 친숙한 파오산은 파리에서 가장 좋은 벗이다. 힘이 들거나 외로울 때에도 가만히 문을 열고 나오면 나를 반겨주는 너.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흔들리는 나뭇잎의 바람소리는 없는 산이지만 나를 기다리는 어떤 무엇이 있다는 게 그 자체로서 마음이 흐뭇하다. 오늘같이 눈이 내린 날에는 향수를 달래주고 막연한 그리움에 가슴아파하는 나를 받아주는 파오산이 더욱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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