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청빈한 가난으로 / 황순희

부흐고비 2021. 4. 12. 08:47

바람이 없어도 시나브로 꽃잎이 지고 있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잎 위로 오월은 저물고 나는 혼자 흔들리는 봄을 보고 있다.

열린 창문으로 가끔씩 정다운 나비들이 찾아와 잠자고 있는 나의 여심을 흔들어 놓지만 문득 저 찬란한 봄의 한자락을 눈물빛 가슴에다 묻고 초연히 엎드려 울고 싶어진다. 지천명의 고개에 들어서야 겨우 삶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고,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자취를 남겨 두고 사라져 갈 뿐, 그 세월 속에 우리들의 기쁨이 우리들의 인생이 쓰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실하다는 것과 소박하다는 것은 때때로 빈약해 보이거나 처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불변하는 그지없이 아름답고 귀한 것이다.

여름날, 시골담 토담 위에 노오랗게 피어난 호박꽃은 객지로 나간 자식들을 기다리며 끝없이 소진하는 어머니의 등불 같아 정답다.

꽃이 지면 씨방이 굵어져 날마다 조금씩 영글어지는 풍성한 열매들, 그것은 장터가 먼 시골 아낙네들에게 항시 넉넉한 여유와 마음의 위안을 주는 훌륭한 먹거리다. 불현듯 찾아든 손님에게 투박한 질그릇에다 된장을 풀어 풋고추와 함께 보글보글 정성으로 끓여진 찌개.

그 옆에다 모양새도 아무렇게 둥글넓적하게 전을 부쳐서 찐 호박잎을 곁들여 내놓았다면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의 청빈한 삶을 보는 것처럼, 마음 편히 먹고 지냈던 그리운 음식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될 것이고, 성찬은 아니더라도 순수한 인정과 가식없는 마음으로 빚어내는 삶의 절실한 무늬에 우리들은 잔잔하게 감동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얼마 전, 사회적인 명예와 부를 다 갖춘 한 유명 선배님의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희망과 생명들이 푸른 파도를 타는 충만한 들판 한가운데 외로운 성 같이 우뚝 서 있는 하얀 집 한 채.

동쪽으로 누워 있는 산 능선이 너그러워 보였고, 황혼으로 물든 저녁빛을 담고 있는 호수 하나가 마냥 꿈결 같았다. 경관이 빼어난 정원주택 정원에는 타일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풀장이 자연을 거부하는 완강한 몸짓으로 현란한 여름의 향연을 기대하며 바짝 말라 있는 자신의 멋을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실 안에는 만화에서부터 각양각색의 진귀한 명품들이 저마다 독특한 멋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유독 우리들의 눈을 현혹시키는데 충분했던 것은 흑단에다가 고급 자개를 붙여 만든 소파였다. 세계 가구 전시장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다는 그것은 중국의 여섯 장인들이 육 년에 걸쳐 만든 걸작품이라고 소개를 했다. 섬세한 세공의 매화꽃 장식은 향기를 발하며 나부끼는 듯했고 모란, 국화, 봉황 등 입체로 각화된 여러 종류의 그림들은 어둠 속에서도 야광충처럼 번득였다. 찻잔을 마주하고 앉은 잘 생긴 선배님의 얼굴도, 상큼하게 예쁜 후배의 얼굴도 그 순간만은 소파의 화려함 때문에 저만치로 밀려났다. 나는 갑자기 풍선처럼 들뜨는 마음을 간신히 붙잡으며 밤하늘 어딘가로 날고 있을 반딧불이 보일까 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어쩌면 자개가 뿜어내는 강렬한 광채보다 더 영롱한 신비로움을 꽁무니에 달고, 먼 산등성이를 넘어 내게로 달려올 것만 같아서이다.

한참만에 어두워진 주변에서 눈을 뗀 나는 아주 귀한 것을 만났다.

원목으로 장식된 싱크대 맨 구석에 금니처럼 박혀있는 조그만 옹기 뚝배기.

그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데 대한 기쁨이 아니라 잊혀진 것이 되살아나오는, 아픈 상처의 어루만짐 같은 것이었다.

누구의 재치였을까. 몇 벌의 수저가 꽂혀 있는 그 질그릇은 화려하지 않고 볼품은 없어도, 낯선 곳에서 당황하는 나에게 맨 먼저 달려와 준 자기의 친근한 얼굴이었으며, 세련된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어설픈 내 모습이었다.

마치 그것은 도심 속에서 해맑게 피어난 한 떨기 들꽃처럼 순박했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들 문화는 눈부시게 풍부한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수하고 청초한 옛 선비의 가난한 정신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앞 논보리밭이 훤히 내다보이는 툇마루엔 종일토록 따사로운 햇볕이 들고 으스름 달밤이면 살창에 일렁이는 댓잎의 수려한 그림자를 즐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지필묵을 가까이 하는 은근한 멋스러움.

밤은 어느덧 삼경으로 접어들어 못다 그린 수묵화 한 점이야 단아한 책상 위에 아무렇게 던져 놓은들 새벽 달빛은 슬며시 그 방을 스며들어 한층 더 격조 높은 분위기를 자아내게 되라라.

박물관의 신라 금관을 구경하면서 예술성에는 관점을 두지 않고 몇 량의 황금에만 눈을 판다면 자신이 부자가 아님이 초라하게 생각되고 또한 그 황금에 욕심이 생겨 무척이나 마음이 괴로워질 것이다.

가난이 천박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가난을 슬기롭게 이겨내지 못하는 비굴한 마음이 곧 가난이며,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처절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즈음의 국화는 지조도 없는지 봄에도 피고 여름에도 핀다.

개나리꽃 역시 동짓달 양지바른 언덕에 겁 없이 피어나는 것을 가끔씩 보면서 인간성 상실을 능가하는 자연의 불순도 함께 보는 것 같아 슬프다.

우리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존경하는 부자는 부와 명예와 권력에 초연한 사람. 남의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큰 기쁨을 남에게 나눠 가지는 은혜로운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아닐까.

겸손하여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고 교활하지 않으며 강물처럼 조용히 소리내지 않는 변함없는 사람이다. 조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균형 속에서 어떤 조화를 이루었을 때 우리는 진실로 그 값진 인생에 대하여 박수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이 세상 생명 있는 모든 것에, 시들어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라도 면면한 정을 주고 살 일이다. 더러는 고왔고 더러는 또 서러웠던 허망히 보낸 시간들을 비워진 내 마음의 찻잔에 호젓이 띄워 놓고 인생을 참회하며 청빈을 사랑하며 고이고이 살다가리라.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꽃 같은 여자 / 정인자  (0) 2021.04.13
아름다운 민들레 / 황순희  (0) 2021.04.12
순댓국은 그리움이다 / 조일희  (0) 2021.04.12
여행 상수 / 방민  (0) 2021.04.12
삶의 슬기 / 전숙희  (0) 2021.04.1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