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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름다운 민들레 / 황순희

부흐고비 2021. 4. 12. 08:50

작년 초겨울, 바닷가에 회를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시장엘 들렀다. 한산하기 그지없는 어촌 장에 뭐 별것이 있을까 그냥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민들레 몇 단을 앞에 두고 쪼그리고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한사코 나를 불렀다. 할머니는 내게 민들레를 권하며, 달여서 먹으면 오장육부, 특히 간에는 더이상 좋을 수가 없다고 굳이 나더러 사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야채나 반찬거리도 아닌 그것을 몸에 좋다고 달여 먹는다는 건 부지런하지 못한 내겐 거짓 같은 이야기고, 설령 공짜로 준다고 해도 필경 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냥 돈 몇 푼을 내밀기에는 노동의 대가를 팔려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당당해 나는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원만 주고 다 가져가. 남편과 같이 달여 먹어봐라. 건강하게 오래 살 꺼이니."

자연을 모독하지 않고, 노변에서 자라나는 풀 한 포기에도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순화된 삶. 순간 냉랭한 바람에 할머니 콧물이 반짝거리더니 그 빛은 나의 가슴에 또 다른 빛으로 고요히 스며들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할머니가 담아 준 민들레를 집으로 가져와 볕 잘 드는 툇마루 끝에다 던져두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집안 청소를 하려고 이것저것 치우다 보니 비닐봉지 안에 무엇인가 노오란 것이 보였다. 아! 그것은 까만색 비닐봉지가 초겨울 햇살을 끌어들여 그 안에서 꽃을 피운 것이었다. 민들레 홀씨같이 백발이었던 그 할머니가 내게 보내준 선물이었을까.

사고팔며 흥정하고, 국산이라고 우기는 시장의 풍경은 대체로 냉정한 거래만이 존재하던 곳이 아니었던가. 나에게 억지를 부린 것 같은 자신이 미안한지 겸연쩍게 웃던 할머니의 미소가 이렇게 꽃이 되어 다시 내게로 오다니!

그것은 서로의 배려와 진실에 보은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틀림없었다. 나는 별안간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 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인생은 소풍날 수건돌리기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삶의 묘미는 언제나 하찮은 곳에 숨어 있음을, 이렇듯 타인을 위한 작은 배려가 큰 기쁨으로 돌아와 다시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 민들레가 너무도 귀해서 꽃은 조그만 꽃병에다 꽂아두고 뿌리는 뒷마당에 심어 두었다. 그것은 해가 갈수록 더 많은 꽃을 피울 테고 꽃씨는 사방으로 흩어져 바람으로, 솜사탕 같은 부드러움으로 산기슭 여기저기에 노오란 민들레 세상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리하여 꽃씨 하나 그 할머니께 다시 날아가 어쩌면 할머니가 사는 동안 내내 민들레를 캐면서 또 누군가의 건강을 챙겨 주다 마침내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할지 모를 일이다.

내 것 하나 남겨 두지 않고 훌훌 털고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이제 할머니가 된 내 인생의 끝도 그럴 수 있다면….

손자는 잠자리를 잡고 나는 울타리 밑 꽃들에게 정성스레 물을 주는 이 평화의 마당은 거룩한 민들레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는 동안 나는 진실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민들레이고 싶다.

내 집같이 편안하고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의 황혼에,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슬 같은 청량함을 줄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노래 부르며 친구집에 놀러가듯 그렇게 가볍게 내 삶을 끝낼 수 있으리, 민들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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