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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메꽃 같은 여자 / 정인자

부흐고비 2021. 4. 13. 08:13

이번 동인지의 주제는 ‘나는 이다’,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야 한단다. 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남편 앞에서 중대 발표를 했다.

“다음 생에도 당신을 만나 살겠어요!”

가끔 TV프로에서 사회자가 출연한 부부를 향해 “다음 생에도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겠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 물음을 자신에게 돌려보곤 했었다. 늘 주저하게 만드는 건 홀 시어머님과 함께 산 긴 세월이었다. 아무리 그 길이 꽃길이라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유행가 가사도 있듯이, 녹록치 않았던 그 세월을 다시 살 용기가 나질 않는 거였다. 그러니 내 딴엔 어렵사리 토해낸 고백이다. 남편의 심중은 알 길이 없지만 그의 입 꼬리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꿀처럼 달콤하기만 해서 그리 말한 건 결코 아니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어른 모시는 것도 다음 생엔 융통성이 좀 생길 것 같았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의 역할을 속죄하듯 다시 한번 잘해내고 싶다는 염원이 어느 날 문득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다시 여자로 태어나야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만나야 하고, 이 남자의 아내여야만 한다.

이유는 또 있다. 평생 동안 남편의 직장 때문에 별리를 반복하며 살았다. ‘빠이 빠이!’ 고사리 같은 손 흔들어대는 아이 안고, 출근하는 남편 배웅하고 맞이하는 이웃집 색시가 몹시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엔 그 평범한 일상에 왜 그리 목말라 했던지. 먼 하늘 바라보며 공허하게 허비했던 시간들이, 온갖 잡념들로 부질없이 감정 소모를 했던 시간들이 돌이켜보니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개척 정신에 불타 확 달라진 인생 청사진을 펼쳐보기 위해 다음 생을 꿈꾸는 건 아니었다.

한때는, 성차별로 불공평한 이 세상이 싫다며 내세엔 꼭 남자로 태어나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셋이나 되는 남동생들에게 양보하느라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했을 때, 외아들한테 시집와서 딸만 둘 낳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할 때 더욱 그랬다. 그런데 지나 놓고 보니 이해되는 측면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겐 도전 정신과 용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겁은 또 좀 많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군대도 못 갔을 것 같고, 전쟁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울 자신도 없으며, 돈벌이할 재주까지 없을 터이니 여자로 태어나길 천만다행 아닌가.

부끄럽지만, 엉뚱한 고백 한 가지를 더 해야겠다. 친지들 중엔 나를‘와이당’ 잘하는 사람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는 이도 있을 것이다. ‘와이당’은 일본말로 술자리에서 지껄이는 외설이라고 한다. 음담패설이다.술 한 모금도 하지 못하는 내가 어쩌다 그런 불명예를 안게 되었을까.그런 말로 분위기를 띄우면서 남을 기쁘게 한다는 봉사심쯤으로 착각한 걸까.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전혀 추해보이지 않는다는 칭찬을 철썩같이 믿었을까. 나름대로 철칙이 있긴 했다. 인류번식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은밀한 그 부분은 절대 실명으로 말하지 않기, 때와 장소 사람 봐가면서 가려 하기. 낯가림을 잘하고 붙임성도 부족한 편이다. 잘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비굴한 변명이 될까. 요즘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스마트폰 카톡으로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시대가 왔다. 신께서 “다음 생에도 그러한 죄를 짓겠느냐?”고 물으면“아니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나로 인해 불쾌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나는 핸드폰으로 꽃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오늘 아침엔 풀숲에 피어있는 연분홍 메꽃을 담았다. 작년 이맘때쯤도 이 자리에서 피었었다.얼핏 보면 나팔꽃 같은데 색깔도 다르고 꽃도 더 작다. 어린 자매들처럼 도란거리며 손잡고 피어 있다. 아기자기하고 화려하지 않은 꽃들의 품새가 왠지 자화상 같았다면 과찬일까. 꽃말은 수줍음, 충성심이라고 한다.

어디에선가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세상에 태어나 가장 멋진 일은 가족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염색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딸, 아내, 며느리, 어머니로 이어지는 여인의 길에 애틋한 감사의 눈물이 묻어난다.이것이 다음 생을 바라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양귀비처럼 미모를 타고난 것도 아니고, 몹쓸 와이당으로 이미지를 쇄신하기도 글렀지만, 내세에도 그 길을 가고 싶을 만큼 나는 천생 여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정인자 수필가:

『월간문학』 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남도수필회원.

수상: 대한문학상.

수필집: 『해 돋는 아침이 좋다』, 공저 『우리들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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