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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장대비가 지나가서인지 아침이 청정하다.

옥상에서 호박 덩굴이 내려와 창문에 매달려 있다. 반가운 손님이라도 찾아온 듯 아이들이 좋아하고 나도 자꾸 창가로 눈이 간다. 여린 잎에 솜털이 보송보송 솟아있고 가는 줄기는 스프링처럼 돌돌 말려서 방안을 기웃거리다 바람에 걸려 그네를 탄다. 호박잎 그늘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맑고 투명하다.

우리는 2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건물 평수나 구조가 일정한 단독주택 단지이다. 교통이 편리해서 좋아했는데, 짐을 풀자마자 호되게 신고식을 치루었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와 그동안 누적된 피로로 감기몸살이 심했다. 잠깐 병원에 간 사이에 때맞춰 도선생이 다녀간 것이다. 간수를 못한 내 잘못은 생각지 않고 좀도둑이 많은 동네란 생각으로 적개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나는 이사 오기 전 한참동안 힘든 일을 겪어서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신뢰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의 이사였던 것인데, 마음이 더없이 움츠러들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피해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동네 골목은 왜 그리도 지저분한지, 잡상인이 꼭두새벽부터 마이크로 외쳐 대는가 하면, 외판원은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두드리고, 집 앞은 마치 시장 통 같았다. '이사를 잘못 왔구나' 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능한 동네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왔지만 좀처럼 정이 들지 않아 모든 게 거슬렸다. 종종 만나는 가게집 주인이나 세탁소 아저씨도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날씨가 더워도 더운 줄 모르고 문을 잠근 채 지냈다. 그리고 다시 또 계절이 바뀌었다.

올여름은 건 장마라서 유난히 덥다. 한차례 소나기가 지난 뒤 이불을 세탁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빨래를 다 넌 후 건성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박 덩굴이 풍성하게 주변을 덮었고 가녀린 채송화 몇 송이는 시들시들 말라있었다. '누가 심었는지 관심이 없구나' 하며 물을 퍼다 흠뻑 적셔 주었다. 도심 속의 이 동네 사람들도 봄이면 저마다의 옥상에다 흙을 퍼 올려 상추며 고추, 호박, 등을 심었다. 나름대로 텃밭을 가꾸어 거두는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나는 관심조차 없던 터였다. 천천히 층계를 내려오며 무심코 이웃집 옥상을 보다가 아니, 짧은 탄성과 함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옆집 옥상에서 유난히 실하게 뻗은 호박덩굴이 우리 옥상으로 건너와 노랗게 꽃을 피우고, 줄기가 내 방 창문을 향해 있는 것이었다. 재빨리 덩굴을 잡고 흔들어 보니 역시 우리 방 앞에서 기웃거리던 줄기였다. '아! 이것은, 어쩌면 이웃들이 나에게 청하는 화해의 손길이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리며 작은 감동이 번져왔다. 당연히 우리 옥상에서 자라다 힘이 넘쳐 방안까지 넘보는 줄 알았는데……. 웅크린 채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에게, 이웃은 넉넉하고 후덕한 호박을 보내어 화해를 요청하고 있었구나.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 동안 싸두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는 듯했다.

이웃이 건넨 화해의 손길은 잎도 무성하고 꽃도 풍성하다. 우선 튼실한 줄기에 달려있는 여린 호박잎을 따서 밥 위에 쪄야겠다. 뚝배기에 된장을 끓이고 쌈장을 만들어 호박잎 쌈을 맛나게 먹으면, 그들의 화해에 응한 것이리라. 아직은 밤톨만한 열매가 앙증맞게 붙어 있지만 그것은 곧 사랑의 전령사로 황금빛을 발하며 보석처럼 반짝일 것이다.

나는 어느덧 농부의 아낙이라도 된 듯이, 누런 호박을 수확하는 염치없는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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