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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의 참회록 / 정비석

부흐고비 2021. 4. 20. 21:40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어느 잡지사에서 나에게 '선생님이 만약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에는 어떤 직업을 택하시겠습니까?'하고 질문해 온 일이 있기에 나는 서슴지 않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살게 되더라도 나는 역시 소설가가 되겠소.'하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나의 생각에는 별로 변함이 없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독자들은 문학에 대한 나의 정열을 높이 평가해 주실지 모르겠으나 사실대로 밝히고 보면 별로 그렇지도 못했다. 나는 60평생을 소설 쓰는 일로만 살아 온 관계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너무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재생하더라도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극히 타당적인 심리에서 그런 대답을 했을 뿐이다.

사실 나는 중학생이던 열네 살 때에 문학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60을 넘어선 오늘까지 문학 이외의 길에는 별로 발을 들여놓아 본 일이 없었다. 굳이 있었다고 하면 해방 직전에 5년가량 신문 기자 생활을 한 일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대학 강사로 이태 가량 재직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도 타의에 의한 임시방편이었을 뿐이지, 나 자신의 의사로서 그런 일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년 시절에 문학에 한번 뜻을 둔 이후로 60이 넘는 오늘날까지 문학의 길만을 외곬으로 걸어왔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견스러운 일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까지 별로 신통한 작품을 남겨놓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나를 소설가로 취급해 주는 것은 그만큼 연공을 쌓아 온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업적이나 성실성 같은 것은 반드시 시간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두고 한 가지 일에만 종사해 왔다 하더라도 그 행위에 정열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낭비해 버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문학을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온갖 정열을 기울여 창작을 성실하게 꾸려나간다 하더라도 작품 하나를 제대로 남겨놓기가 어려운 판인데, 하물며 특출한 재능도 없는 사람이 문학을 합네 하고 엄벙덤벙 세월만 보냈다면 그야말로 취생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까지 40년간이나 문학을 해 온 나 자신의 작가적인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나는 문학을 합네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문학을 항상 배신하면서 살아 왔다. 8.15해방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하룻밤 사이에 예수를 배반한 일이 세 번이나 있은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거니와, 나는 한평생 문학에 집착해 오면서도 8.15에서 6.25를 거쳐 4.19에 이르는 15년 사이에 문학을 세 번씩이나 포기하려고 했었으니,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문학에 대한 나의 성실성이 얼마나 부족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디 나는 생활의 방편으로서 문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38이북이 고향인 관계로 모든 재산을 공산도배들에게 빼앗겨 버려서 지금은 알거지가 되었지만, 8.15이전에는 먹고 살아가는 데는 별로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문학이라는 것을 취미로 시작하였다. 더구나 일제 말기에는 간악한 일제가 우리네의 글과 말을 말살시키려고 했기에, 나는 그에 대한 심리적인 반발이 느껴져서 굳이 문학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8.15해방 후에 세상이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다가, 얼마 후에는 38선이라는 것이 생기며 모든 재산을 일조일석에 빼앗기게 되고 보니, 그때에는 문학에 대한 애착보다는 당장 처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할 일이 큰 걱정이었다.

지금 40 미만의 젊은이들은 8.15 직후의 우리네 사회의 혼란상 같은 것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우리라. 그 당시는 신문이라는 것이 겨우 타블로이드판으로 4면이었고, 잡지 같은 것은 제대로 나오는 것조차 없었으니, 글을 써서 밥을 먹어 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생활의 방도를 다른 데로 택해야 할 판인데, 나는 웬일인지 월급쟁이 같은 것은 생리적으로 싫었다. 그야 물론 학교 선생이나 신문 기자 같은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먹고 살아가기 위해 이왕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나설 바에는 돈을 벌기 위해 장사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장사를 하자면 밑천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장사 밑천을 마련해 보려고 한동안 동분서주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장사 밑천을 대 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을 포기한 채 한동안 장사꾼이 되려고 미쳐 돌아가다가 때마침 모 고등학교와 모 대학에서 전임 강사가 되어 주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생리에 맞지 않는 학교 선생님 생활을 2, 3년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몇 해 후인 6.25 직전에 사회가 다소 안정되어 문필 생활이 가능하게 되자, 나는 일단 배반했던 문학의 길로 다시 돌아왔었다.

그것이 문학에 대한 나의 최초의 배반이었다.

문학을 두 번째 배반하게 된 것은 6.25사변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의 한복판인, 수하동에 살고 있었는데, 1.4후퇴를 하게 되자 주위의 사람들은 저마다 남부여대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가건만, 나만은 돈이 한푼도 없으니 엄동설한에 어린 자식들을 다섯이나 데리고 어디고 떠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중공군과 인민군이 물밀듯 몰려올 서울 한복판에 그냥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9.28 수복 이후에 국군이 북진하는 바람에 나는 소위 종군 작가로서 50여 일간을 일선으로만 뛰어다니다가 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 사정이 그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은 한강 건너 상도동 일가 집에 피신을 시키기로 하고 나 혼자만 피난길에 올랐다. 말이 피난이지 가족을 그냥 남겨 두고 피난길에 오르는 나는, 살려고 떠나는 길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아 나서는 심정이었다.

혼자서 피난길에 오르자니 가슴이 찢어지게 괴로울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처자식을 그 꼴로 만들게 된 것도 역시 문학에 집착했기 때문이라 싶어서, 나는 금후에 다시 평화의 날이 오더라도 문학만은 완전히 포기해 버릴 결심이었다.

그러기에 평소에 애용했던 '파카'와 '워타만' 두 자루의 만년필조차 의식적으로 내버리고 떠났다. 그런 마물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는 언제 또 문학의 길에 되돌아오게 될지 모르리라 싶어서 문학과는 영영 인연을 끊으려고 만년필조차 내버린 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기괴한 운명인지, 대구까지 피난을 내려가 직장을 구하려고 하니 나를 채용해 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에, 신문, 잡지사에서는 소설을 써 달라고 성화같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얼마 후에는 가족까지 대구에서 합류하게 되고 보니 나는 당장 쌀 한 봉지를 사기 위해서도 그처럼 굳게 배신했던 문학의 길을 다시 걸어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문학을 세 번째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은 4.19 직후의 일이었다.

4.19 직후에 나는 한국 일보에 (혁명 전후)라는 연재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나흘 만에 1천 6백여 명의 연세 대학 학생들에 의하여 소위'데모'라는 것을 당하였다. 나는 4.19학생 혁명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하고 내가 목격한 그 당시의 생생한 사실들을 소설 속에 그대로 기록하여 후일에 역사적인 재료로 제공하려 했건만, 워낙 극도로 흥분한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의 오해로서 나는 본의 아닌 핍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때만은 문학을 단연코 포기해 버릴 생각에서 "이조실록" 전질을 비롯하여 책을 모조리 팔아 가지고 외국 여행을 한 번 다녀온 뒤에, 모 신문에 "문학과 이별한다"는 선언문까지 발표해 버리고 다른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외우 송지영 형이 세계적인 광고 대리점인 일본의 '덴스' 한국 대리점을 맡기로 되어 있었기에 나도 송 형과 함께 그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국제 광고를 국내에 유치해 오자면 국내 신문들과 미리 배면 계약이 있어야 하므로, 나는 국내의 10여 신문사와 계약까지 맺었다. 사업이 순조롭게 진척되어 전망은 매우 밝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나의 운명의 탓이었는지, 사업 기반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뜻하지 못했던 5.16군사 혁명이 터졌다. 그래서 모처럼의 공들인 탑이 일조일석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혁명 정부는 외국의 광고 대리점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그 사업의 총책임자였던 송지영 형이 다른 사건으로 형무소에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사업도 송두리째 거덜이 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사회적인 변혁이 있을 때마다 문학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였고, 더구나 세 번째는 '문학과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고 만천하에 선언까지 해놓았건만 5.16후에는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문학과 나와는 영원히 끊지 못할 악인연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생계를 수월하게 꾸려나갈 다른 방도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문학을 포기해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잘 쓰거나 못 쓰거나 간에 나를 용납해 줄 세계가 문학 이외에 또 어디 있을 것인가.

돌이켜보면 서글프기 짝이 없는 방황하는 일생이었다.

문학이 나에게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인 줄 진작 깨달았던들, 나는 모든 정열을 문학 하나에만 기울여서 지금쯤은 제법 대작가가 될 수 있었으련만, 60평생을 문학의 아마추어로만 살아 왔으니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정비석(1911~1991):

소설가. 평북 의주 출생. 일본 니혼 대학 문과 중퇴.

통속적인 신문 소설로 대중의 인기를 끈 바 있는 정비석은 흔히 애정 소설만 쓴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그 문장의 점착력이나 심리, 상황의 뛰어난 묘사는 그를 수필 문학에 있어서도 많은 작품을 남기게 하였다.

"산정무한"은 금강산 기행문의 일부인데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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