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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버지 / 정목일

부흐고비 2021. 4. 20. 14:54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어언 14년이 지났다. 나는 간혹 길가에서 아버님의 친구 되시는 분을 만나면, 그분의 두루마기 자락에서 문득 아버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때, 나는 열여덟 수줍은 고등학교 2학년, 병 중에 계시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통곡했다. 가족이라야 어머니와 장남인 나, 그리고 어린 여동생 둘, 다섯 살짜리 남동생뿐이었지만. 나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울음을 멈추도록 명령했다. 가시는 마당에 고이 보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담임선생님께 보낸 결석계와 같이 동봉한 편지 속에, ‘지금 나의 심정은 이제 막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 크루소와 같습니다.’라고 적었던 것을 기억한다. 문상객이 올 적마다 하는 곡(哭)은 목 속에서만 뱅뱅거렸지, 끝내 소리로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제발 문상객도 오지 말았으면 좋겠고 빨리 이 의식이 끝나, 나 혼자만의 시간 가운데서 조용히 아버님을 생각해 보고, 또 슬퍼해 보고도 싶었다. 장례식 때의 나는 오! 얼마나 고독한 소년이었던가.

아버님의 상여가 나가던 날, 안개가 자욱하였다. 생전 처음 삼베옷을 입고 대지팡이를 짚고 머리에는 새끼관을 썼다. 짚신을 신고 고개를 밑으로 떨어뜨린 나는 속절없이 무슨 큰 죄를 지은 죄인이었다. 참 부끄러웠다. 그런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안개는 부끄러움으로부터 나를 비호해, 비로드 자락처럼 부드럽게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안개 속으로 울긋불긋한 만장(輓章)이 앞서 가는 뒤로, 상두꾼의 구슬픈 목소리에 흔들리며 상여는 우리 집을 떠났다. 상여 뒤로 외상주가 된 나는 비로소 청개구리처럼 눈물 없는 곡을 간신히 토해내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때, 내 울음은 안개 속으로 번져가 한 방울 작은 안개로 숨어버리지 않았는지 자세히 보니까, 안개는 그대로 풀풀 휘날리는 슬픔의 알맹이들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남자가 태어나서 두 번 우는데 한번은 날 때, 또 한번은 부모가 돌아가실 때라고 하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누가 옆에서 같이 울어 주었다면, 나는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을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큰 위안을 얻었을 것인가.

상여의 행렬이 장지에 도착하였을 때 남몰래 실눈을 해 가지고 도둑처럼 훔쳐본 하늘엔 벌써 안개가 말갛게 걷히고, 햇빛이 분수처럼 뿜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이라도, 나를 자욱이 감싸주던 안개의 위안을…. 아버님과 영원히 결별(訣別)하던, 안개 아침의 기억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아버님은 진주 지방에서 잘 알려진 골동품 수집가이셨다. 방 가득히 진열된 골동품들은 그 방을 항상 신비롭게 만들었으며, 마치 작은 박물관을 연상하게 했다. 벽에 빙 휘둘러 친 병풍이며, 족자들….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의 자기며, 불상, 청동거울, 수저, 그리고 더 아득히 먼 옛날의, 부서져 형체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인 돌칼, 돌창살이며, 갖가지 유물들이 가득하였다.

언제나 손님들이 끊일 새 없었고, 댓돌 위에 손님들의 신발이 가득하면 나는 쪼르르 아버님의 방으로 갔다. 그러면 손님들은 대개 얼마의 돈을 주는 것이지만, 나는 돈을 받는 재미도 좋았으려니와, 그보다 아버님의 펼치는 서화(書畵)를 손님들 틈에 끼어 보는 재미가 더 좋았다. 사군자(四君子), 산수화, 풍속도, 인물화, 그리고 갖가지 글씨들이 모두 내 눈을 황홀하게 했다. 그리고 또 깊은 곳에 넣어둔 오동나무 상자를 열어 솜뭉치 속에 들었던 귀중한 자기나, 불상을 꺼낼 때 손님들이 탄식처럼 발하던 감탄을 들으며 가만히 엿보는 것이 여간 대견스럽고 재미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은 아버님께서 안 계신 틈을 타 자기(磁器)로 만든 사슴을 꺼내어 목에 줄을 매달고 마루로 끌고 다니다 그만 땅에 떨어져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아버님께 처음 매를 맞고 쫓겨났지만, 아버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6.25 동란 때도 아버님이 제일 걱정하시던 것은 역시 골동품이었다. 땅에 묻을 것은 묻고 감출 것은 감추어 둔 후에도 골동품만 가득 짊어지시고 늦게야 피난을 하셨던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 있다. 아버님이 남기신 골동품을 모두 팔아버린 일이다. 살림이 딱하여 그리 된 일이지만, 그 때 어떻게 하더라도 참지 않고 너무 경솔한 짓을 저질러 두고두고 한스러울 뿐이다. 살아 계실 적에는 아직 어려 효도 한 번 못함이 갈수로 가슴에 사무치는데 오히려 돌아가고 난 후에, 더 큰 불효를 저지른 셈이다.

나는 아버님이 그리울 때면, 조용히 골동품 가게를 찾아간다. 골동품 가게에서 이것저것 보노라면 아버님의 얼굴이 선히 나타나고, 아버님의 체취,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버님은 오동나무 상자 깊이 넣어두셨던, 청자(靑磁)의 국화 혹은 학(鶴)의 우아 선명한 무늬를 생각하고 계실까?

아버님의 가르침은 항상 ‘사내다워라’ 이셨다. 사내답지 못한 나에게, 늘 사내다우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래서 싸움에 못 이기고 돌아온 때에도 꼭 얼굴을 씻어 눈물 자국을 지웠다. 상대방이 터무니없이 싸움을 걸어왔을 때, 피하거나 지는 것을 못난이라고 꾸짖었다. 언젠가 어머님이 ‘싸움에는 늘 피하는 것이 제일이다.’고 하셨을 때, 어머님도 역시 못난이라는 핀잔을 들으셨다.

아버님은 청년 시절, 동네에서 알아주는 씨름꾼이었다고 한다. 우선 체격이 크고 건강하셨다. 예순이 넘으시고도 아침에 냉수마찰을 하시던 분이다. 유달리 일찍 일어나신 아버님은 추운 겨울에도,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당에서 냉수마찰을 하시면 우리 식구들은 찬 바람에 몸을 떨며,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매정할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님의 또 하나 가르침은 애국심이었다.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해 티끌만한 일이라도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님의 골동품을 수집하게 되신 동기를 ‘우리나라의 보물들을 일본인이 다 훔쳐간다. 그러니 우리 손으로 이것을 하나라도 지키기 위해서다.’라고 언젠가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아침 일찍 나를 깨웠던 것도, 나의 건강을 염려하심이 아니었던가. 나는 한번도 아버님께 칭찬같은 걸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사실 아버님은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던가.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존경하기는 하였으나 깊은 정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너무 엄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첫아들을 얻은 요즈음 더욱 아버님의 생각이 간절해지고, 따뜻한 정을 새삼 느끼게 되는 건 무슨 일일까?

언젠가 아버님의 방에 한 그루 난(蘭)을 그린 족자가 걸려있었다. 낙관(落款)도 없는 난 옆에 <난향십리)란 화제가 씌어 있었다. 난(蘭)의 향기 십리까지 뻗는다는 과장법은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불과 넉자로 집약된 그러나 끝없는 상상과 향기를 주는 그 표현을 나는 두고두고 아끼며 음미하고 있다. 그것은 숫제 과장법이 아닌 진실 그대로였다. 난의 향기 십리 뿐만이 아니라, 십 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그 난향(蘭香)은 짭쪼롬한 그리움을 몰고 내 가슴에 스며오는 것이다.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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