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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구부러지고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 한없이 걷고 싶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며 컹컹 개 짖는 소리, 문지방에 앉아 한가롭게 우는 고양이라도 만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골목길이다.

신도시에서는 골목길이 더욱 그립다. 골목길은 사람의 발이 만든 자생의 길이다. 골목길은 시간이 발자국과 함께 쌓여서 생긴다. 사람에 의해 생겨난 길은 불멸의 길이 된다. 그 길은 없어져도 그 길을 걸었던 기억 속에 남아 이어지기 때문이다. 골목길은 몸과 마음이 함께 걷는 길이기에 잊혀 지지 않는다.

대로(大路)는 차를 위한 차들의 길인지 모른다. 대로는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하다. 일취월장의 성공가도처럼 보인다. 곧게 뻗은 대로는 정책 입안자들의 계획으로 책상 위에서 만들어진 길이기에 그 길에는 자본주의와 경제 논리가 달리고 있다. 오랜 시간을 들이고 뜸을 들일 필요도 없다. 인스턴트 음식처럼 빠르고 편리한 것을 우선 가치로 만들었다. 삶의 절망이나 생의 향기가 스며들 수 없는 가공의 길인 것이다. 깨끗하고 반듯한 그 길은 출세한 사람의 얼굴처럼 구김살도 보이지 않고 그늘진 구석도 없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진창이 된 날, 천근같은 발걸음을 대로는 잘 받아 주지 않는다.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은 뒤꿈치를 내칠 뿐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골목길은 걸어 본 사람만이 골목길을 제대로 알 것이다. 갖가지의 사연으로 제각기 무게가 다르게 찍힌 발자국들 위에 내 발을 포개면서, 내 발자국을 보태면서 어느새 발걸음이 가벼워져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나면 평상시의 발걸음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연히 골목길도 신발이 빠질 만큼 진창인 날이라면, 이열치열로 더위를 다스리는 것처럼 진창은 진창을 만나 서로를 맞장구치며 위무하게 되어 좋다. 이런 것들이 대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골목길의 숨은 힘이다. 이런 뒷심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골목길을 잊지 못한다. 왠지 골목길도 그런 사람을 기억해 줄 것이란 믿음까지 저절로 생긴다. 그래서 이심전심으로 골목길을 찾게 된다.

대로의 화려한 꽃들은 질서정연하게 장식되어 조화 같은 착각을 일으키지만 골목길에는 봉선화, 맨드라미, 채송화 같은 소박한 꽃들이 마음을 아늑하게 이끈다. 간혹 길모퉁이에는 해바라기나 석류가 큰 키로 이웃들을 보고 듣고 있어야 골목길답다. 구부정한 담장 위로 해님 같은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해바라기만큼 골목길에 어울리는 꽃은 없다. 환한 얼굴로 해를 향하고 있는 해바라기는 골목길에 뛰노는 아이들을 닮았다. 비록 깨진 플라스틱 통이나 과일 상자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라도 해바라기를 멈추지 않는다. 골목길에는 아이들과 해바라기가 함께 꿈을 키우는 중이다.

열린 문틈으로 런닝구 바람으로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보이고 뒤에서는 무엇 때문인지 아낙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포장되지 않은 사람의 입김이 살아 있는 곳, 굳이 감추지 않는 삶의 뒤통수를 볼 수 있는 곳. 골목길은 수필의 본령대로 진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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