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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향에 젖어드는 시간이면 대구 옛집이 그리워진다. 대청마루에 서면 멀리 미군 부대 높은 건물이 보이던 변두리 동네였다. 아담한 기와집 담장에는 아버지의 붓글씨로 적힌 ‘방매가’란 종이가 붙어 있곤 하였다. 대문을 들락거릴 때마다 방, 매, 가, 하며 소리 내어 읽었다. 겨우 글을 익힐 무렵이었다.

화창한 초여름 날, 아기를 업은 부부가 방을 보러왔다.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돌아간 그 사람들이 며칠 후에 이사를 왔다.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안방엔 우리가 살았고 왼쪽 건넌방에는 석이네가 세 들어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집은 오른쪽 방에 이삿짐을 풀었다.

나는 석이와 새로 이사 온 오른쪽 방을 며칠째 기웃거렸다. 또래 여자아이가 있었지만 밖으로 나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심심함을 못 이긴 석이와 나는 늘 건너다보며 호기심을 키워오던 미군 부대까지 가보자고 대문을 나섰다.

우리는 회색 담벼락에 붙어 서서 발돋움을 하고 부대 안을 구경하였다. 그곳은 그동안 내가 궁금해 하며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국방색이라는 칙칙한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과 비슷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실망을 가득 안고 돌아서는데 벌써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어머니께 꾸중 들을 게 뻔해서 막 달음질을 할 때였다.

“어라, 한 지붕 아이들이구나. 여기까지 놀러왔니?”

새로 이사 온 아저씨였다. 퇴근하던 길인지, 아저씨는 들고 있던 누런 봉투 안에서 깡통 두 개를 꺼내 우리한테 주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받아 들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냅다 집으로 달렸다.

그것은 콜라 캔이었다. 깡통따개도 없어 마시기도 어려운 터라, 이튿날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 모처럼 자랑거리가 생겨 먹는 것 이상으로 포만감을 누렸다. 이튿날 퇴근한 아저씨가 열쇠고리에 달린 깡통따개로 따 주어서 우리는 그 신비의 맛을 보게 되었다. 가무스레한 물을 삼킬 때의 달콤 짜릿함은 무슨 맛에도 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였다. 아저씨는 여자아이 둘을 더 데리고 왔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나와 동생 둘, 석이까지 한집에 있는 걸 보고 같은 자기네 아이들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이가 넷이라면 방을 안 줄 것 같아 본의 아니게 속였다며 미안해했다. 아저씨는 집이 꼭 마음에 드는 데다 근무지와 가깝고 특히 주인아주머니가 참 좋아서라고 덧붙이자 어머니는 웃고 말았다.

나는 신이 났다. 늦게 데려온 인자 언니와 어울려 이제 오른쪽 방에도 망설임 없이 몰려 다녔다. 그러면서 콜라 말고도 색다른 기호식품을 인자네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한 방에 모여 껌이나 초콜릿도 맛보았다. 소시지를 욕심내어 덥석 한 입 베어 물었다가 느끼한 맛에 모두 뱉어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어른들이 원색 그림이 그려진 매끌매끌한 책을 볼 때가 있었다. 아이들은 쫓는 분위기며 소시지의 생김새를 말할 때의 표정이 낯설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콜라하고는 다른 걸 마실 때였다. 입속이 단번에 화해지는 껌도 아니고 콜라도 아닌, 향기가 기막히는 그 음료는 잡지 책과 함께 아이들은 근접할 수 없는 성인물이었다. 궁금증이 더할수록 그 갈색 물은 더욱 신비롭게 여겨졌다.

화단에 여름꽃들이 만발한 어느 날 아침, 이마에 돋은 땀띠가 아침 햇살에 따끔거려 수돗가에서 씻고 있을 때였다. 화단에서 별무리처럼 핀 채송화를 보며 곱다고 감탄하던 인자 엄마가 갑자기 안고 있던 아기를 내던지곤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다. 내 비명소리에 달려온 어머니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익숙하게 일으키곤 흙을 털고 옷끈을 느슨하게 해 주었다. 며칠 뒤에도 뒤꼍 장독대 옆에 인자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 한 번 발작하고 나니 자주 그런 증상이 나타났는데, 그게 간질병이란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많이 돋았던 땀띠도 거의 스러지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이었다. 인자 엄마는 병원으론지 친정으론지 가고 낯선 아주머니가 인자네 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한낮에는 아직 더웠는데 문을 꼭 닫은 채 나지막한 말소리가 어색하게 이어지다 끊기곤 하였다. 나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방문 앞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으나 침묵 사이로 진한 커피 향내만 새어 나왔다.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된 날이었다. 숨어 있는 아이들을 찾아서 인자네 부엌에까지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부엌 부뚜막에 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다. 얼마나 맛보고 싶었던 갈색 물인가. 나도 모르게 사기 컵을 들어 홀짝 마시는 순간, 방에서 나오는 아주머니한테 놀라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머니께 혼이 나면서 생각해 봐도 커피 맛은 모르겠고 깨지던 사금파리 소리만 귀에 쟁쟁하였다. 왠지 억울한 생각에 크게 울며, 술이나 담배가 아닌데 왜 못 먹게 하냐고 어머니께 대들었다. 어머니는 정색을 하고 나무랐다.

“그 쓰겁은 물 좋아하면 팔자가 사나워진다.”
“팔자, 그게 뭔데?”
“사람살이……. 더 크면 알게 돼.”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어렴풋이 내가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가 있고 커피를 마시면 그걸 빨리 알아버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간이 지나니 인자 엄마가 아닌 아주머니가 인자네 식구들과 한방에서 생활하는 게 예사로 보였다. 인자네 동생들도 더 이상 엄마를 찾아 울지 않게 되었다. 찬바람이 불던 저녁, 방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전기 기술자였던 인자 아빠가 달아 놓은 대문 벨이 삐이 울렸다. 늦은 시간에 웬 손님일까 하며 어머니가 나가려는 순간에 후다닥 인자네 아주머니가 우리 방으로 뛰어들었다.

인자 엄마가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주머니와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에서는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아주머니 얼굴은 우리 집 꽃밭의 달리아꽃을 닮았는데,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비 오는 날의 달리아꽃이 생각났다. 그런 연상만 남기고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떠났다.

이튿날 인자 엄마는 왜 그랬는지 하얀 한복을 입고 우리 방에 건너왔다. 옷 때문인지 얼굴이 백짓장 같고 흰 코스모스처럼 가냘프게 보였다. 인자 엄마도 아주머니처럼 울었다. 어머니도 따라 울었다. 인자 엄마가 더욱 서럽게 울자 어머니는 눈물을 닦고 나가서 커피를 끓여왔다. 커피 향기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인자 엄마 등을 다독이는 어머니의 손길이 오래 계속되었다. 그 뒤 인자 엄마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병원에 있다가 돌아와서도 우리 방에서 커피 잔을 두고 오래 앉아 있곤 하였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어도 우연히 한 울타리에 깃들게 된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의 삶을 껴안고 함께 울고 웃으며 아파했다. 인연이니 이웃 사랑을 앞세우지 않아도 따스한 인정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 나이를 넘고 보니, 그 때의 어머니를 알고도 남겠다. 조강지처인 인자 엄마와 반대 입장인 여인, 모두를 연민으로 대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겠다. 나는 이제 여자의 삶이란 자신의 의지나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아는 나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마도 애꿎은 커피에다 팔자 핑계를 대어본 것이 아닐까.

추억 속의 커피 맛은 혀끝이 아닌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커피 향에는 사람 사는 냄새도 함께 저장되어 있는 듯하다. 요즘 들어서 커피 한 모금을 머금으면 진한 향속에 그 시절 정경이 떠오르고 그 사람들이 무척 보고 싶어진다. 그들도 지난날 검정 기와집에서 엮었던 삶 한 자락을 가끔씩 커피잔 속에서 떠올릴까. 나도 누구의 커피 향 속에 그리움으로 섞여들 수 있을런지…….

내가 버거워하는 인간관계야말로 삶의 과정을 누구와 더불어 겪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탓일 게다. 희로애락을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한 것이라 해도 맞을 것이다.

커피 좋아하면 팔자 사나워진다고 하셨던 어머니는, 내가 글과 씨름할 때면 커피를 끓여 주셨다. 설마 딸의 팔자가 사나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터.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막혔던 글이 줄줄 풀려나왔다. 글쓰기란 곧 삶을 담아내야 하는 작업임을 문학에 문외한인 어머니가 벌써 아셨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아셨을까. 아마 커피를 좋아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팔자가 사나워진다 한들 글쓰기를 도와주는 커피라면 나는 오래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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