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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재봉틀 / 윤자명

부흐고비 2021. 4. 21. 12:13

가끔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파도소리나 개울물 흐르는 소리, 비 내리는 소리처럼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도 내게는 자연의 소리처럼 느껴진다. 이런 소리는 불면증이나 우울증을 완화시킨다고 한다. 잠이 쉬 들지 않는 밤이면 달달달 재봉틀 소리가 간절히 듣고 싶다. 사라진 소리들이 어디 한둘일까만 어머니가 밤새 머리맡에서 돌리던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고 싶은 날이 많다.

막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밤중에 수런거리는 기척이 나서 깨어 보니, 아버지가 군용 담요로 꼭꼭 싸맨 꽤 무거운 물건을 지고 오셨다. 안방까지 들어온 아버지의 어깨에서 어머니는 신주 단지 모시듯이 무거운 것을 받아 안았다.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은 우리 남매들 눈에 검은 덩치는 낯설었다. 미군 부대에서 구해 온 중고 재봉틀이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 날부터 안방 윗목에 자리 한 재봉틀은 귀한 존재가 되었다. 며칠 간 재봉틀 조작법을 익힌 어머니는 드디어 재봉틀 앞에 앉아 손바느질의 백배도 넘는 능률에 감탄하였다. 그 시절 여인들의 필수인 바느질의 노역을 감당해 주던 재봉틀은 하나의 기계나 사물이 아니었다. 안방에서 함께 사는 가족 같은 존재로 서서히 우리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듣는 재봉틀 소리가 어느새 자장가로 들렸다.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부르면 잠은 더욱 감미로웠다. 그렇게 어머니와 재봉틀은 내게 동의어처럼 인식되어 갔다.

재봉틀의 튼튼한 버팀쇠 사이에 ‘SINGER’라 쇠 글씨는 뜻과는 상관없이 눈을 감아도 훤히 보였다. 그즈음 아버지가 병이 나셨다. 재봉틀은 더욱 믿음직한 어머니의 친구가 되었다. 긴 겨울밤에는 대답 없는 재봉틀을 붙잡고 넋두리도 하고 칭찬도 하며 어머니는 밤을 함께 지새웠다.

재봉틀은 수많은 옷가지들을 누비며 우리집 가정사까지 새겼을 물건이다. 긴 세월 한 방에서 동고동락한 애장품을 물건이라고 부르는 건 미안한 일 같다. 사람과 이렇듯 친밀하게 교감을 나누고 감정이입을 했던 물건에 마땅히 붙여 줄 말이 없는 게 안타깝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재봉틀을 대면했을 적의 감회를 아직 잊지 못한다. 낡아서 제 기능도 못하는 그 물건에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듯 착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이 만든 물건이지만 사람보다 더 긴 수명을 누리는 물건에서 느끼는 아이러니라니.

더 이상 바느질조차 못하는 재봉틀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뜻밖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한 방에서 똑같이 재봉틀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형제들에게 재봉틀 소리는 각각 달랐다. 막내여동생은 지겨운 소리로, 남동생은 사춘기에 어머니에게 향하는 불만을 가끔 재봉틀을 걷어차며 화풀이 했다고 털어 놓았다.

사물에도 사람과 비슷한 나름의 운명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들어지는 순간 어떤 환경 어느 장소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혹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것이다. 물건과 인간의 관계에도 애착과 친밀도는 천차만별이다.

아득한 인류의 조상들이 돌이나 나무를 주워 도구로 쓸 줄 알게 되면서 인간은 도구와 공존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 ‘호모해빌리스’의 유전자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유용한 물품 연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을 만큼 경이로운 물건을 만들어 그 물건에게 도리어 자리를 빼앗기기도 한다. 컴퓨터나 핸드폰이란 최첨단 도구는 인간이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든 물건에 인간이 종속되어 피해를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계 중에 재봉틀만큼 여자들의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드물 것이다. 그 기계에는 모성애와 여성성이 스며들어 쇠붙이에 온기가 돌게 된 때문일까.

‘달달달’

마치 생명이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슨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재봉틀 소리가 그리운 것은 모성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의 작용일까. 아니면 지난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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