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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대 없는 빈 바다 / 황희순

부흐고비 2021. 4. 22. 12:45

봄 여름 내내 꽃 피어 환하던 그 길에 이제 낙엽이 쌓이고, 상념과 회상의 겨울 바다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모의 한 자락을 붙들고 울리는 자선냄비의 간절한 종소리가 아니더라도 나는 충분히 그대와 동행할 수 잇는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바다를 좋아했던 그대. 바닷가에만 서면, 주체할 수 없는 정열로 온 가슴을 다 열어 젖히고 열망에 떨던 그대. 그랬던 당신이 어느 날 갑자리 그 바다를 이젠 안을 수 없다면서, 결코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말을 남겨놓고 도망가듯 훌쩍 가 버린 그때 그 망연한 눈빛을 나는 여즉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흙으로 덮어 버릴 수만 있다면 메꾸어 버리고만 싶던 꿈틀거리는 욕망에 들뜬 봄바다, 방황의 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벌거벗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도전의 여름 바다. 투쟁의 바다. 보랏빛 머플러를 두른 여인이 하염없이 울고 가는 푸념의 바다, 통곡의 그 가을 바다도 나 혼자서 다 감당하라고 내버려둔 채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침잠해 있습니다 그려.

양보만 하고 살다가 보면 인생까지도 난도질당하고, 마음을 열고 살다 보면 운명까지도 도난 당하고 만다는 알지 못할 분노의 좌절에 떨며 느닷없이 나를 떠난 시간이 이토록 오랜데, 내가 어떻게 묵시만 하고 있을 수 있나요. 늘 내 외로움과 고통을 감당해준 그대, 눈망울 흥건히 다 젖도록 속상하고 힘들어 하소연을 하면 끝까지 내 얘기를 들어주다가 종내는 철부지 어린애의 투정이라는 듯 빙긋이 웃고만 있던 그대. 그대 없는 빈 바다에 혼자 있으면 나 또한 깊이도 모르는 슬픔과 까닭 없는 돌팔매질로 하루는 보낼 뿐 바다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위안도 주지 못합니다.

나는 당신더러 결코 갈 수 없는 저 아득한 수평선을 정복해 보라는 억지도 쓰지 않았고, 야망에 찬 넓은 바다를 가슴으로 다 안아달라는 지나친 강요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다는 메울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람의 욕심은 메꾸지 못한다는 말을 내가 자주 했었죠.

그저 남들 다 잠든 밤 하얗게 부서지는 은파를 타고 끼룩대는 물새소리를 들을 줄 알고, 월광에 흠뻑 취해 진실로 내가 마음으로 울 수 있는, 가슴 축축이 적시는 작품만 써주면 된다고 했는데 그런 내가 당신에겐 너무 부담스러웠나요. 아니면 내가 또 철없이 욕심을 부렸나요.

우리는 조그만 두 개의 동공으로도 한꺼번에 바다를 다 볼 수 있지만 저 바다는 절대로 우리를 주시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두 손으로 저 바다를 감싸 안을 수 있는 따스한 정감이란 것이 있지만 바다는 날름거리는 혓바닥으로 내몰아치기만할 뿐 결단코 우리들을 그 중심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바다는 늘 그랬습니다. 보고 싶어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달려왔어도 언제나 밀려가고 밀려오는 저 요지부동의 거부와 그런 반복의 연속일 뿐.

우리에게 놓여진 운명을 스스로가 헤쳐 나갈 수밖에 그 어떤 위인도 되지 않았다는 것과 손에 잡히지 않는 물거품의 세계를 통해 확실하게 현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헛된 오기를 부리지 말고 야망의 늪에서 벗어나세요. 자학하는 삶은 가슴에 피멍만 더 선연하게 할 뿐, 그대에게 어떤 이유로든 가치 있는 삶이 되게 할 수는 없어요. 어째서 지치고 힘겨운 삶을 당신 혼자서만 감당하고 산다고 믿으세요.

많은 사람들이 고해의 수레바퀴에 걸려 고된 시련과 역경을 견디면서 어쩔 수 없이 참고 살고 있음을 깨쳐가야 합니다. 나 또한 철저하게 지키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 하나로 나를 이겨내며 나와의 끊임없는 싸움에서 얼마나 멍울진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지 그대 어찌 알 수가 있으리.

자신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면 영영 망가지고 못 쓰게 되어 종내는 버리게 된다는 걸 현명한 당신은 빨리 계산에 넣어야 해요. 가장 건강하고 넉넉한 사람은 12월에 울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고뇌를 혼자 다 짊어진 듯이 포효하는 함성으로 다가오는 저 도도한 겨울바람. 그 칼날 세운 바람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한 잎까지 다 빼앗겨 버리고 발 밑에서 아지직 바스라지는 세월의 아픈 소리를 들어야 하는 나목들.

그래도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는 듯, 있는 팔 다 벌리고 참으로 편안하게 서 있는 나목들의 몸떨림을 꼭 쓸쓸하고 초라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여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빛나는 지성을 우리는 훈장처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크게 호흡 한 번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보세요. 영원히 날개도 돋지 않는 겨드랑이,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어 봤자 결과도 없이 절박함만 더할 뿐, 구름은 쉬임없이 흘러가고 바람은 또 불어 올 것입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저 바다에 대한 달콤한 낭만을 빨리 찾게 해 주세요. 너무 오랫동안 날 혼자 내버려두면 끝내는 나도 깊은 병에 들 것 같습니다.

그대는 결코 그렇게 무심하고 가혹한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하루 빨리 저 넓은 바다를 향해 다시 힘차게 달려올 것을 믿고 오늘도 이렇게 기다립니다.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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